영화 평점 주기의 난점
나에게 영화는 총체적인 장르다. 이 말은 곧 사물이 아니라는 전제를 기저에 깔고 있다. 영화는 자본주의 시장에서, 결코 예술이 될 수는 없지만 에술의 꿈을 품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해석자(비평가)는 영화의 꿈을 포착해 언어로 풀어내는 것이 참된 임무라 생각한다. 그러니 영화를 단지 상품처럼 별점(평점)으로 평가하는 행위 자체는 ‘영화는 사물이다’라는 명제를 바탕으로 하기에 부정적이다.
그럼에도 자본주의 시대에, 총체적인 장르인 영화 역시 사물화될 수 밖에 없고, 영화를 재단하는 방식 역시 사물화될 수 밖에 없다. 수많은 영화 평론가가 별점이라는 허상 위에 자신의 지성을 뽐내고, 대중은 그 별들의 반짝임에 이끌려 작품을 재단한다. 별점, 한 줄 평, 그리고 상세 평으로 이어지는 이 익숙한 도정에서, 예술로서의 영화 비평에 대한 난파의 위기에 처한 심정이다. 총체적 미학의 결정체인 영화를 어찌 숫자 하나로 가둘 수 있는가. 이 계량화된 폭력이 과연 예술적 가치를 품을 수 있는가.
물론, 나 역시 편의성을 위해 별점을 매기곤 한다. 그러나 나의 손끝이 남긴 이 숫자들이 과연 영화라는 심연의 깊이를 포착할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는 여전하다. 영화 비평이 제 이름값을 하려면, 그저 반짝이는 별점이나 찰나의 휘발성 감상이 아니라, 최소한 200자 원고지 10장에 달하는 성실한 사유가 필요하다. 영화 감독론이나 영화사적 지평을 아우르는 상호 텍스트적 비평이 아니더라도, ‘영화를 영화로만 보는’ 신비평에 가까운 작업을 위해서라도 2000자라는 분량은 최소한의 예의이자 출발점이다.
'서사를 어떻게 연출로 승화시켰는가'라는 지극히 근원적인 명제에 충실하기만 해도, 장편 영화 한 편에 대한 진실한 비평은 최소 정도의 지면을 할애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현행의 영화 평점 시스템은 이러한 복잡다단한 예술적 시도를 획일적 기준으로 짓누르고, '몇 점짜리 영화'라는 초라한 프레임 속에 가둔다.
효율성이라는 가치 아래 모든 것을 재단하려는 이 시대의 속성상, 별점 시스템이 즉각적 정보 전달에는 능할지는 모른다. 그러나 연출이라는 우회와 암시를 통해 비로소 가치를 가지는 영화라는 작업에 있어서는, 이처럼 일차원적인 평가 방식은 배제되었으면 한다. 예술로서의 영화 비평은 단지 숫자 따위로 설명될 수 없는, 언어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언어라는 세례를 받았으니, 적어도 수치가 아닌 언어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그 혜택을 온전히 누렸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