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겨울이란 하얀 눈의 세례를 받은 설경으로 다가온다. 그중에서 백미는 아이들이 만든 엉성한 눈사람이다. 하얗게 펼쳐진 여백 위에서, 아이들의 작은 손끝에서 태어난 눈사람이 서있는 풍경은 겨울뿐만 아니라, 사계절 내내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다. 앙증맞은 나뭇가지 팔, 동글동글한 검은 돌멩이 눈, 그리고 활짝 웃고 있는 듯한 주황빛 당근 코까지—정성스럽게 삐뚤빼뚤 쌓아 올린 눈사람. 삭막한 도시의 회색 건물들 사이에서, 또는 조용한 마을 어귀에 덩그러니 서 있는 눈사람을 바라보면, 문득 가슴 한구석이 찡해진다. 언젠가 사라질 걸 뻔히 알면서도 아이들은 모든 마음을 쏟아 이 덧없는 존재를 만든다. 그 순간만큼은, 찰나 같은 희미한 기억처럼 아득하지만, 눈사람이 담아내는 아름다움은 무엇보다도 순수하고 숭고하게 느껴진다. 그것은 아마도, 이 작은 눈덩이 안에 도구적 이성의 굴레를 벗어난 순전한 미메시스의 의미가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고대 아리스토텔레스부터 현대 프랑크프루트학파까지, 수많은 인문주의자들이 분석한 인간의 고유한 특징 중 하나는 모방하는 존재라는 점이다. 흔히 미메시스라고 하는 특징은 인간 본능이라고 할 수 있다. 옛날 시골 아이들이 소꿉놀이하는 모습을 떠올려 보자. 손에 흙을 쥐고 밥을 빚으며, 아무렇지 않게 길가의 돌멩이를 반찬 삼는다. 요즘은 아이들에게는 자연에서의 놀이가 많이 옅어져 보이나 이들도 여전히 모방한다. 책이나 TV에서 본 개와 고양이, 원숭이 흉내를 내며 깔깔대기도 한다. 영화 <이웃집 토토로>에는 아이들이 나무가 자라는 모습을 모방하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가 보여주듯, 이것은 놀이라기보다 동심의 상상력을 보여주는 주술에 가깝다. 그런 장난스러움과 상상이야말로 시작점에 선 미메시스 아닐까. 눈사람을 만드는 손길도 마찬가지다. 차가운 눈덩이를 굴리며 인간의 형상을 빚어내는 일은, 마치 현실 너머의 환상을 재현하는 창조의 기쁨이다. 생명 없는 눈덩이에게 얼굴을 달아주고, 검은 조약돌로 눈을 새겨 넣고, 당근으로 코를 만들어 주는 그 순간, 죽은 듯한 것에 생기가 돌기 시작한다. 바로 그때, 무의미해 보이던 눈의 덩어리가 아이의 상상력과 사랑을 먹으며 또 하나의 친구가 되어 살아난다.
하지만 오늘날 모방 행위는 순수함을 잃고, 도구적 이성 아래 오염되어 버렸다. 효율을 극대화하고, 이윤을 쫓으며, 끊임없이 소유하고 지배하려는 시대. 사랑한다며 새를 새장 안에 가둬버리는 어른들, 어쩌면 그들이야말로 미메시스를 오해한 대표적 예가 아닐까. 이정하 시인의 말처럼, 새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오히려 자유롭게 풀어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자본주의에서 자연을 본뜨고 흉내 내는 수많은 예술이나 생산의 행위들도, 소유욕과 실용적 가치에 얽매이는 순간 생명의 근원적 빛을 잃어간다.
이렇게 오염된 미메시스의 세상 속에서, 아이들의 눈사람 만들기는 <이웃집 토토로>의 주술처럼 하나의 마법이 된다. 눈사람 만들기는 단지 놀이를 넘어 세상의 때가 묻기 전 순수한 동심을 지키려는 제의적 행위이다. 모더니티에 오염되지 않은 그들은 눈사람을 도구로 보지 않는다. 팔 생각도, 오래 보존하려는 마음도 없다. 어느 화창한 봄날이면 흔적도 남기지 않고 녹아 사라져버릴 걸 알면서도, 아이들은 그 잠깐의 생명에 온 마음을 다해 사랑을 쏟는다. 바로 그 순수하고 연약한 아름다움이야말로 ‘무용성’의 미학이 빛나는 순간이 아닐까.
눈사람은 실용적 가치를 내세우지 않는다. 추위를 가려주지도 않고, 배고픔을 달래지도 않으며, 단 한 푼의 이익도 남기지 못한다. 어쩌면 이 무용하고 비생산적인 존재야말로 현대 사회의 도구적 이성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그 자체로 빛나는 증거다. 아이들은 눈사람이라는 이름의 친구를 통해 뭔가를 얻고자 하지 않는다. 그저 눈사람이 잠시 존재하는, 삶의 한순간을 기쁨으로 채운다. 계산도, 소유욕도 없는 이 창조 행위 속에서 어른들조차 잊고 지낸 순수한 존재의 가치를 새삼 떠올리게 된다.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완전해지는 아름다움, 바로 그 세계 속에서 잠시 숨을 쉬게 된다.
눈사람이 우리 마음에 오래 남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 찰나에 피어나는 아름다움 때문일 것이다. 눈사람은 언제나 잠깐 스쳐 지나가는 환영처럼, 한순간을 품고 있다가 조용히 사라진다. 모든 유한한 것들이 그렇듯, 해가 뜨고 기온이 오르면 스르르 녹아내리는 눈사람을 바라보고 있자면, 우리는 소멸이라는 존재의 본질 앞에 잠시 생각에 잠기게 된다. 그 모습은, 영원함이나 변치 않는 가치를 집착하는 자본주의적 허위의식을 은근히 되돌아보게 만든다. 아이들은 눈사람이 녹아가는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며, 무엇인가를 만들고 소중히 여기는 마음과 더불어, 이 세상 모든 것이 언젠가는 사라진다는 자연의 이치를 희미하게나마 받아들인다.
어른들은 눈사람 만들기를 그저 한때의 놀이쯤으로 여기곤 한다. 하지만 오히려 우리 어른들이 아이들에게서 배워야 할 것이, 바로 이 눈사람 만들기 속에 숨어 있다. 머릿속 가득한 계산과 효율성의 굴레를 잠시 벗어던지고, 아무 목적도 없이, 순수한 창조의 즐거움과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한 기쁨을 느끼는 마법. 나중에 남는 것 하나 없어도, 가진다는 의미조차 없는 이 눈사람 만들기를 통해, 우리 일상 깊숙이 밴 모더니티의 도구적 이성이 조금이나마 맑게 씻겨 내려가길 조심스럽게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