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초, 젠더관와 에로스의 변화

영화 <봄날은 간다>

by 꿈꾸는 곰돌이

<봄날은 간다>가 포착한 2000년대 젠더관과 에로스의 변화


<봄날은 간다>는 영화 비평가들에겐 훌륭한 멜로 영화겠지만, 이 영화를 문화 비평적으로 사유하자면 훌륭한 당대의 젠더관과 에로스를 포착할 수 있는 작품이다. 한국 사회가 급변하던 2000년대 초, 사랑과 관계에 대한 오랜 유교적 질서가 서서히 해체되고 새로운 가치관이 싹트던 과도기의 풍경을 탁월하게 포착한 작품이다. 이 영화는 순수하리만치 전통적인 사랑을 갈구하는 남성 상우와, 관계의 유동성을 인정하며 자신의 주체성을 잃지 않으려는 여성 은수의 대비를 통해, 변화의 물결 속에서 흔들리는 한국인의 정서와 사랑의 민낯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이는 고정불변의 관계를 이상으로 여겨온 유교적 가치관이 개인의 욕망과 자유 앞에서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목도하는 문화비평적 텍스트로 읽어볼 수 있다.


영화는 자연의 소리를 담는 사운드 엔지니어 상우(유지태)와 지방 방송국 라디오 PD 은수(이영애)의 만남으로 시작한다. 상우는 업무차 전국을 배회하며 소리를 녹음하다가 은수를 알게 된다. 두 사람은 푸른 대나무숲과 고요한 절, 한적한 바닷가를 함께 걸으며 세상의 다양한 소리를 녹음한다. 상우는 녹음기를 들고 순간의 소리를 영원히 담아내려 애쓰는데, 그 모습에서 은수를 향한 그의 순수한 사랑이 시작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두 사람의 사랑은 자연 풍경의 소리처럼 은근히 번져간다. 함께 녹음 여행을 다니며 감정도 무르익고, 상우는 솔직하게 은수에게 마음을 표현한다. 밤늦게까지 함께 녹음을 하다가 이른 아침 라면을 끓여 먹는 장면(‘라면 먹고 갈래?’의 원조로 유명하다)이나, 상우의 대가족이 사는 집에 들러 서로의 일상을 나누는 모습이 정겹다. 상우의 맑고 순진한 마음은 이혼의 상처를 가진 은수의 마음을 서서히 열게 하고, 두 사람은 결국 연인으로 발전한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처음부터 온도가 달랐다. 상우는 사랑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라 믿고 은수에게 온 마음을 쏟지만, 은수는 관계를 조금 더 현실적이고 유동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녀에게 사랑은 계절처럼 자연스럽게 왔다 가는 감정일 뿐, 한 곳에 묶이거나 영원히 지속될 거라는 약속은 의미가 없다.

상우는 이런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 채 은수에게 집착하게 된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는 그의 절규는, 단순한 개인의 슬픔을 넘어 사랑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상우는 은수를 찾아가 눈물로 애원하거나,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는 등 애처로운 모습을 보인다. 자신이 믿어왔던 사랑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경험 앞에서, 그의 순수함은 좌절과 상실 속에 무너진다.

세월이 흘러, 상우는 자신을 따뜻하게 돌봐주던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는 아픔을 겪는다. 그는 죽음과 이별을 통해, 인생에서 변화와 떠나보냄을 인정하는 법을 배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가족을 잃는 상실이라는 큰 경험을 거치며 한층 더 성장하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상우와 은수는 우연히 버스 정류장에서 마주쳐 짧은 인사를 나눈다. 상우가 손에 들고 있던 풍경이 바람에 흔들리며 낸 맑은 소리는, 지나간 사랑의 아픔과 아쉬움 속에서도 삶은 계속되고, 변화와 이별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은근히 전해준다.


<봄날은 간다>는 2000년대 초, 빠르게 자본주의적 에로스 방식이 체화되던 당시 한국 사회의 혼란스러운 정서를 상우와 은수라는 두 인물을 통해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 영화는 단순한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를 넘어, 유교적 가치가 여전히 남아있던 한국 사회에서 인간관계의 모습이 어떻게 무너지고 변화하는지를 담아낸 인상적인 예다.

상우는 겉으로 보기엔 순수하고 매력적인 인물로 보이지만, 마음속에는 사랑이나 관계를 소유하려는 구시대적 욕망과 ‘어떻게 사랑은 변하니?’라는 집착이 자리한다. 그는 자신이 보여준 만큼의 사랑을 은수에게서 돌려받기를 기대하고, 두 사람의 관계 역시 유교적 전통이 약속한 것처럼 영원히 지속되길 바란다. 즉, 상우는 전근대적 남성상에 가까워, 남성으로서 가정을 책임지고 헌신하는 사랑을 당연한 의무로 여긴다. 그의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는 물음은 단순히 연인의 변심에 실망하는 말이 아니다. 인간관계의 변함없음을 절대시하던 유교적 가르침이 무너지는 현실 앞에서,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전통적 남성의 쓸쓸함과 좌절이 섞인 독백처럼 다가온다. 이처럼 상우의 순수함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무너지는 전통 남성성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은수는 주체적인 여성성의 전형을 보여준다. 한 번의 이혼 경험이 있지만 이를 숨기지 않고, 그 당시 남성 중심의 직군이었던 PD로 일한다. 은수의 모습은 그 자체로 유교적 여성상에 대한 강한 도전이다. 오랫동안 유교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에게 종속되고,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희생하며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존재로 치부되어 왔다. 하지만 은수는 이혼이라는 아픈 경험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그녀는 사랑이 언제든 변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어떤 관계 속에서도 자신의 감정과 주체성을 지키려 애쓴다. 은수에게 사랑은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소중한 경험이지만, 결코 자신을 구속하거나 얽매는 굴레는 아니다. 그래서 상우가 보여주는 헌신이나 집착 역시, 은수에게는 자유를 위협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결국 은수의 차가워 보이는 태도 역시 달라진 시대 속에서 한 여성으로서 자신을 지켜내고, 독립적인 존재로 살아가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영화는 이처럼 충돌하는 두 인물을 통해 2000년대 초 한국 사회가 겪던 관계론의 과도기를 예민하게 그려낸다. 오랜 시간 견고했던 유교적 관계 질서는 IMF 사태 이후 더욱 가속화된 개인주의와 서구적 가치관의 유입으로 인해 서서히 해체되기 시작했고, 개인의 욕망과 주체성이 관계의 영속성보다 중요해지는 시기로 접어든 것이다. 상우의 고통은 이러한 변화의 흐름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구세대적 정서의 잔상이며, 은수의 담담함은 새로운 관계 양식의 도래를 알리는 듯하다. 그에 대한 가치 판단은 들리지 않고, 아름다운 자연의 소리가 공명할 뿐이다.


<봄날은 간다>는 사랑은 물론, 인간관계 그 모든 것이 영원불변할 수 없다는 지극히 자연의 변증법적 진리를, 유교적 가치관의 붕괴라는 거시적인 틀 속에서 섬세하게 조명한다. 세상에 변하는 것은 단지 사랑뿐만이 아니라, 그 사랑을 둘러싼 사회의 규칙과 사람들의 가치관 또한 끊임없이 변모한다는 것을 영화는 쓸쓸하면서도 아름다운 풍경, 그리고 소리로 보여준다. 사랑의 자유화가 단지 진보만은 아니나, 이 영화에서는 그런 가치 판단은 없이 쓸쓸하면서도 목가적인 그림으로 표현한다.

월, 수, 금,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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