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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곰돌이 Nov 26. 2023

시인을 비판한다

다중 위기 시대의 시적 영혼은 유효한가

 오늘날 시적 영혼은 유효한가? 역사를 통틀어 인류에 손꼽히는 대가들은 위대한 시인이었다. 호메로스, 단테, 괴테, 니체, 횔더린, 보들레르... 시인이란 귀족 영혼의 소유자다. 자본주의가 체화된 이후에서야 느낄 수 있는 멜랑꼴리를 선험적으로 소유한 천재들이다. 멜랑꼴리는 분명 천재들의 징표임은 분명하나, 한 가지 의문점은 도대체 어디다가 쓸 것이냐이다. 멜랑꼴리는 슬픔, 조금 더 명확하게 하자면 무기력한 슬픔이다.


 실존적 위기를 겪는 다중위기의 시대에, 무기력한 슬픔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 세계가 멸망할 지라도, 잘난 영혼의 고귀함을 가다듬는 시인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시인은 천재적인 영혼의 소유자로, 실존을 위협하는 야만-하이데거의 관점에서 기술문명에 치를 떨 사람들이다. 그러나 유물론적인 접근을 하지 못하고, '기술'자체를 혐오하거나 문명을 모조리 부정하며 본인의 고귀함을 가다듬는데 열중할 뿐이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라는 마르크스의 혁명적 철학에 정확히 반한다. 다중위기의 시대의 시인은 무기력한 한량일 뿐이며, 슬픔을 노래하나 단지 노래에 그치는 무기력한 신선이다. 스스로 대붕이라 생각하겠지만, 실천하지 않는 대붕은 까투리보다 하찮은 존재다.


하이데거처럼 시인의 영혼을 지닌 사람이 나치에 가담하거나, 카라지치가 시인이었던 것이 단순한 우연임이 아님을 상기했을 때, 시인의 영혼-댄디즘은 소멸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의 지식과 시인의 영혼을 지닌 나에게, 시란 모든 예술중 고귀한 양식 따위가 아니다. 무기력한, 너무 무기력한 한량의 노래에 불과하다. 혁명적 시인-브레히트, 마야콥스키, 김남주, 박노해등-소수를 제외하면 시란 결국 야만에 굴복이다.


시가 아닌 테제로! 시인이 아닌 전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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