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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곰돌이 Dec 06. 2023

슬퍼할 필요 없다, 아포리즘 산문집 <아침의 피아노>

책 소개에 앞서 짧게나마, 김진영 선생님과 나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내가 김진영 선생님을 알게 된 계기는 유투브에 발터 벤야민 강의 영상을 통해서였다. 비판이론과 발터 벤야민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선생님의 강의는 대중적이면서도, 철학자로서의 아름다움이 남아있었다. 허세만 부리는 교수들에 비해 소탈하면서도 쉬운 선생님의 강의를 찾아보고자 인터넷에 선생님의 이름을 검색했지만, 이미 고인이셨다. 


  내가 선생님과 일반향적인 소통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책이었다. 발터  벤야민 강의록과 아도르노 미니마 모랄리아 강의록을 읽었다. 댄디즘에 오염되지 않은 소탈한 강의는 나를 범비판이론의 세계로 인도했고, 그 덕에 비전공자로서 어느 정도 기초적인 지식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또 학교 교수님이 김진영 선생님 녹취록도 주신 덕분에 쉴세 없이 들을 수 있었다. 그중 <아침의 피아노>라는 녹취록이 있었고, 궁금해서 동명의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은 산문집이자, 아포리즘 형태로 되어있다. 암선고를 받고 투병생활을 다룬 아포리즘 형태의 일기다. 책에서 언급된 롤랑 바르트의 <애도일기>처럼, 말그대로 죽음의 위협과 지난 날의 성찰을 담은 애도일기다. 

 

   하이데거의 실존주의에서 '죽음'이란 현존재의 가장 고유하고, 가장 극단적이며, 가장 확실한 가능성이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인식이 삶의 의미를 만든다고 말한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상황에서 쓰여진 이 아포리즘은 그 동안의 삶을 성찰하고, 깊은 사유가 담겨있다.


 짧게는 한, 두 문장의 단문으로 쓰여져 있어, 사실 읽는데 있어 그리 어렵지는 않다. 완독 자체는 대중 교통을 타며 2시간 안에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포리즘은 그렇게 읽어서는 안된다. 한문장, 한문장안에 보이지 않는 사유를 읽어야 한다. 니체의 저작들, 발터 벤야민의 <일반통행로>, 아도르노의 <미니마 모랄리아>를 읽은 적 있지만, 그 사유를 온전히 추적할 수는 없었다. 그나마 해설서 덕에 절반 정도 소화할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이 책의 경우  그 정도까지의 난이도는 아니다. 대신 난해하기보다 쉬우며, 무엇보다 문장 그 자체로서 시적이고 아름답다. 사랑이 가득하고, 인간스러움으로 점철된 그의 사유를 온전히 이해하고자 거의 일주일이 넘는 기간 동안 다시 읽었다. 문장의 의미를 해설하고, 가치를 매기는 것보다 인상 깊었던 구절에 대해 간추려 올려보고자 한다. 여기 기록된 문장은 기독교를 믿지 않는 내 삶의 성경이 되주길 바란다. 


1.아침의 피아노. 베란다에서 먼 곳을 바라보며 피아노 소리를 듣는다. 나는 이제 무엇으로 피아노에 응답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틀렸다. 피아노는 사랑이다. 피아노에게 응당해야 하는 것, 그것도 사랑뿐이다.


3.지금 내게 필요한 건 병에 대한 면역력이다. 면역력은 정신력이다. 최고의 정신력은 사랑이다.


4.슬퍼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슬픔은 이럴 때 쓰는 것이 아니다.


13.분노와 절망은 거꾸로 잡은 칼이다. 그것은 나를 상처 낼 뿐이다.


14.살아 있는 동안은 삶이다. 내게는 이 삶에 성실한 책무가 있다. 그걸 자주 잊는다. 


17.지금까지 내게 사랑의 본질은 감정의 영역에 국한되었던 건지 모른다. 내가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온화함, 다정함, 부드러움 등의 조용함 감정들..... 그러나 사랑은 한 단계 더 높아져서 정신이 되어야 한다. 정신으로서의 사랑. 사랑은 정신이고 그럴 때 정신은 행동한다.


38.물들은 사랑의 역학을 가르친다. 물들의 사랑은 급하고 거침없고 뚫고 나간다.


43. 문득 어떤 영웅의 삶을 생각한다. 조용하고 장엄한 삶의 주인공들.


75. 비 오는 날 세상은 깊은 사색에 젖는다. 그럴 때 나는 세상이 사랑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가득하다는 걸 안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세상을  사랑하는지도 안다.


99.삶은 향연이다. 너는 초대받은 손님이다. 귀한 손님답게 우아하게 살아가라.


120.나는 사랑의 주체다. 그러나 나는 사랑을 할 줄 모르는 건 아닐까. 사랑을 줄 줄도 받을 줄도 모르는 건 아닐까.


136.내가 끝까지 살아남아야 하는이유는 그것만이 내가 끝까지  사랑했음에 대한 알리바이기 때문이다.


138.사랑과 아름다움에 대해서 말하기가 힘들다. 그 말들이 나이건만, 그 말들이 없으면 나도 없건만. 나는 말해야 한다.  사랑과 아름다움에 대해서 말하기를 멈추면 안 된다. 그것이 나의 존재에 대한 증명이다. 


153.사랑이란 무엇인가. 그건 나의 죽음이 누군가를 죽게 하고 누군가의 죽음이 나를 죽게 만드는 것이다.   


163.레닌은 말했다고 한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다. 오직 저 종려나무만이 푸르다."     

179.나의 그리운 유토피아 왠지 마음이 따뜻하게 설레고 왠지 기쁨이 자꾸 솟아나는 그곳     

185.사랑의 마음이란 무엇인가. 그건 내부에만 거주하는 것이 아니다. 그건 외부로의 표현이다. 사랑의 마음, 그건 사랑의 행동과 동의어다.     

188.나의 존재 자체가 축복이고 그래서 사랑 받을 자격이 충만함을 알게 하고 경험케한 부모님에 대한 기억     

192.자유란 무엇인가. 그건 몸과 함께 조용히 머무는 행복이다.     

216.사랑과 꿈이 없는 정치라는 게 과연 가능한가, 그런데 오늘날 정치는 이 자신의 동의어를 배반하고 망각해버렸다.      

234.내 마음은 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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