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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곰돌이 Dec 22. 2023

1.한병철 <피로사회> 메모와 단상

불행한 책읽기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의 어두운 이름,성과사회 :한병철 《피로사회》메모와 단상

 한병철씨의 <피로사회>를 읽었다. 이전 <에로스의 종말>을 읽고, 에로스의 혁명적 성격을 조명한 그의 시선이 탁월하다고 생각해 선행 한국에서 공학 학사 취득 후, 독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며 독일에서 활동하는 작가로 이 책도 사실 독일어로 쓰여졌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무의식적으로 한국 사회를 염두해두고 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21세기 한국 사회에 적용해보면, 꾀나 잘 들어맞는다. 


 시대마다 고유한 질병이 있다. 과거에는 박테리아적 질병이 가장 큰 문제었지만, 항생제의 발명으로 종식을 고했다. 그렇다면 현대 사회의 가장 큰 질병은 무엇인가? 21세기의 질병은 정신적 질병들이다. 우울증, ADHD, 소진증후군,경계성 장애 등이 대표적 예시인데, 이 질병들은 타자의 부정성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긍정성 과잉이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긍정성이야 말로는 좋게 들리겠지만, 성과에 대한 과한 긍적은 결국 사람의 정신을 피로하게 만들어 미치게 만든다.      

 작가는 이 시대의 문제를 과잉 긍정으로 보며, 현대 사회를 성과사회로 규정한다. 푸코가 말하는 규율 사회는 끝났다. 복종적 주체가 아니라, 과잉 긍정을 통한 자기 착취로 만드는 성과 주체로 만든다고 한다. 즉, 자기 착취를 긍정하는 시대가 바로 성과사회다.     

성과사회는 "하면 안된다"라는 규율사회의 용어를 쓰지 않는다. "예스 위 캔"이라는 긍정의 조동사를 쓰는데, 이것은 자기 착취를 위한 구조적 가스라이팅이다. 하면 안된다는 구조사회는 범죄자와 낙인을 만들어 낸다면, 할 수 있다는 믿음은 우울증 환자와 낙인을 만들어낸다. 달리 말하자면, 전자본주의 사회에서 천재들의 징표였던 멜랑꼴리를 대중들에게 체화시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알랭 에랭베르를 언급하며, 우울증을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이행기에서 나타는 현상이라고 말한다. 거기에 작가는 우울증을 사회적 명령 뿐 아니라, 사회의 원자화와 파편화로 인한 인간적 유대 결핍의 측면에서도 나타난다고 본다. 그래서성과를 향한 압박이 결국 탈진 우울증을 유발한다고 본다. 마르크스주의적 용어로 말하자면, 우울증은 성과사회의 규율이 만들어낸 소외의 현상이라는 것이다.     

 성과사회는 억압과 자유를 변증법적으로 보여준다. 그 누구도 억압하지 않은 자유로운 사회로 보여지지만, 성과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는 것이다. 그 결과 개인은 착취자이자 동시에 피착취자로 만들고, 가해자이자 피해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과사회에서 개인은 역설적 자유, 강제구조로 인한 폭력으로 돌변하는 자유를 얻는다. 그래서 성과사회의 심리적 질병은 바로 이러한 역설적 자유의 병리적 표현인 것이다.      

활동사회라고 불리는 성과사회는 점차 도핑사회로 발전해간다. 성능 없는 성과를 가능하게 만드는 도핑은 인간을 성과기계로 만들어 최대의 성과를 만들도록 한다. 그렇지만 도핑을 금지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도핑은 단지 사회적 발전 경향의 결과일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성과사회를 극복할 수 있는가? 철학자답게 문화비평적 측면에서는 분석에는 탁월한 시선을 가졌지만, 해결책은 공허하다. 한 마디로 느림과 깊은 사색을 강조한다. 느리고, 깊은 사색적 삶이 성과사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 대안으로 본다. 정말 철학자다운 철학적 해결책이다. 동양적 사유와 비슷한 것 같다. 불교의 열반 개념과 비슷해보이고, 장자의 사상도 보인다. 니체 사상으로 치자면, 사색의 위버맨쉬 되기를 말하는 것 같다. 여기서 모호한 해결책은 분명 답답한 측면도 있지만 독자의 영역으로 열어둔 것 같다.     


단상     

1. 한병철의 시선을 포스트구조주의라고 볼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 푸코를 창조적으로 계승한 것 같다. 규율사회를 비판하면서, 나온 성과사회는 근본적으로 마르크스주의적 혁명이 불가능함을 암시한다. 혁명이 불가능하다고 보는 인식 자체는 포스트구조주의적 관점이지만, 기존 포스트구조주의를 또 한 번 전복한 한병철의 관점을 무엇으로 정의해야 할까? 한병철주의라고 해야 할까?    

  

2. 이 책을 읽기 전에 읽은 <에로스의 종말>을 무척 공감하면서 읽었는데, 그 책에 나온 성과주체를 비롯한 개념을 완벽히 보충해준 것 같다. 어쩌면, <에로스의 종말>이야말로 이 책의 각주와도 같다. 성과사회의 가장 큰 문제로, 에로스의 종말을 말하는 것 같다.     


3.규율사회가 완전 끝났다고 할 수 있는가? 글쎄, 한국의 경우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이행되었지만, 그 흔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정량평가를 벗어나지 못한 경쟁 교육과 군대가 대표적인 것 같다. 서구 사회는 한국 사회보다 더 성과사회에 가깝고, 중국과 권위주의 국가들은 아직 규율사회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사회에도 성과사회의 흔적이 있을 것이다.      


4.팔레스타인의 경우, 지구상 가장 불행한 규율사회일 것이다. 성과사회가 규율사회보다 선진적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실존을 위협하는 규율사회의 고통을 성과사화에 사는 내가 이해할 수 있을까?      


5.성과사회라는 개념을 인정한다는 것은, 어쩌면 혁명의 불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성과사회에서는 자본가의 착취에 맞선 마르크스주의적 혁명은 불가능하다. 착취의 주체가 자신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과 싸워야 하는 모순적 상황이기 때문이다.      


6.성과사회를 가장 잘 설명하는 현상은 자기계발 유행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착취에 빠진 자기계발에 빠진 사람들은 오직 성과를 위해 깊은 사색에 빠지지 못하도록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계발서는 포르노와 비슷하다. 포르노가 죽은 섹스를 만든다면, 자기 계발서는 사람을 성과기계로 만든다. 섹스 없는 포르노는 자기계발서다.      


7.성과사회에서 맞써기 위해 깊은 사색이 필요한 것에는 동의하나,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성과사회를 조장하는 지배계급과 맞서야 한다. 즉, 자기착취의 알을 깨고, 누가 그 괴로운 착취를 강요했는지 사색해볼 필요가 있다. 성과사회는 자본주의 지배계급의 새로운 지배 전략이다. 규율사회에서는 숨어서 채찍질한다면, 성과사회에서는 당근을 매달아 놓는다.  그 당근을 먹더라도, 더 큰 당근을 욕망하도록 유도한다. 그러니, 당근을 먹고자 경쟁을 통해 하나, 하나 주워 먹지 말고 자본가와 싸워 당근밭을 확보한 뒤 나눠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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