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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곰돌이 Jan 22. 2024

타자의 변증법의 종말, <타자의 추방>

8.불행한 책읽기

<타자의 추방>     


 20세기 이전 근대 철학에서 핵심이 되는 개념은 주체에 관한 개념이다. 주체가 어떻게 인식하는지, 존재하는지, 사유하는지가 철학의 주된 관심사였다면, 20세기 이후 철학 사조인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에서는 주체의 개념을 바깥으로 돌린다. 실존주의의 교황이던 사르트르가 '타인은 지옥이다.' (정확히는 지옥은 바로 타인들)이라고 말했듯이, 20세기 철학은 타자화가 만들어낸 비인간적 참상들에 대한 성찰을 했다. 아우슈비츠의 지옥이나 제 1,2차 세계대전의 참상이 타자화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포스트식민주의 이론가들은 백인 및 서구 중심적 체제가 식민지 민중들을 타자화 시켰는지 폭로했고, 페미니즘 이론가들은 남성 중심적 체제가 어떻게 여성을 타자화 및 대상화했는지 추적했다. 그러나 한병철의 <타자의 추방>에서는 한 발 더 나아가서 타자의 종말을 선언한다.


"타자가 존재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타자는 지옥이지만, 문제는 타자의 추방을 야기한다는 점이다. 타자의 추방은 타자의 부정성을 거부하는 시스템은 자기 파괴적인 특징을 나타낸다고도 말한다. 타자의 부정성과 변모가 엄밀한 의미에서 경험을 만들어낸다. 경험은 고통스러울지라도 필요하지만, 오늘날 '같은 것'은 고통을 주지 않는다. 이러한 타자의 추방은 인식의 과정에서도 볼 수 있다. 막스 셸러의 <사랑과 인식>을 인용하며, 인식은 구원이라고 한다. 인식은 타자로서의 대상에 대해 사랑하는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타자의 추방은 타자로서의 인식-사랑을 불가능하게 만들며, 결국 구원에 도달하지 못한다. 오늘날의 소통 디지털 혁명의 부정성인 소통 소음, 데이터와 정보의 디지털 비산이 진리의 소리 없는 굉음과 고요한 위력을 듣지 못하게 만든다. 하이데거식으로 말하자면, 존재망각을 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한병철은 여기서 '디지털 무간격'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가까움과 멂은 동일자와 타자처럼 서로를 변증법적으로 매개한다고 하며, 타자에 의해 활력을 얻는다고 말한다. 그러니 디지털 무간격은 가까움과 멂의 모든 변주 형태들을 제거하며, 아우라를 제거하며 신비를 없앤다. 한 예로, 포르노는 영상의 일반적인 기법인 과잉근접과 과잉조명은 모든 아우라적인 멂, 에로틱한 것의 핵심적인 멂을 파괴한다. 같은 것의 지옥에서는 타자를 욕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를 같은 것의 지옥으로부터의 구원해주는 타자의 추방은 너무나도 비극적이다.

 한병철은 오늘날의 테러리즘에 대해 세계적인 것의 테러 자체가 테러리즘을 낳는다고 말한다. 세계적인 것의 폭력-같은 것의 시스템-에 대한 균열을 내기 위해 테러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신자유주의는 절대 계몽주의의 종착지가 아니라고 말한다. 신자유주의는 광기가 테러리즘과 민족주의 형태를 만들고, 자유를 내세우는 척 하지만 자유 자체를 착취하며, 생산성과 효율성을 극대화한다. 이것이 신자유주의의 비열한 논리다. 그러면서 해결책으로 칸트를 인용하며, '환대'의 개념을 말한다. 타자를 소멸시켜 소통을 불가능하게 하는 테러리즘이 아니라,이방인에 대한 환대를 주장한다. 보편적 이성이 한 사회의 문명화 정도를 보여주는데, 그 척도야말로 환대라고 말한다.

 신자유주의적 사회는 (푸코가 고안한 개념으로 다루다는 뜻)헤테로토포스적인 차이들을 위해 (바르트가 말한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이라는 뜻의)아토포스적인 다름을 제거하려고 한다. 즉, 타자의 부정성은 같은 것의 긍정성, 더 나아가 같은 타자의 긍정성에 밀려나간다. 그래서 병적인 나르시시즘적인 강제를 낳는다고 말한다. 이런 사회는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으로 설명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신자유주의의 지배 하에 착ㅊ취는 소외나 자기 탈현실화가 아니라 자유와 자기실현, 자기최적화로 진행된다. 여기는 나에게 노동을 강요하고,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소외시키는 착취자로서의 타인이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나는 나를 실현한다는 믿음 속에서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착취할 뿐이다. 이것이 신자유주의의 비열한 논리로, 소진에 따른 열광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오늘날에는 세계나 노동으로부터 소외가 아니라, 자신으로부터의 소외-자기 소외는 다름 아닌 최적화와 자기 실현으로부터 온다고 말한다. 부정성이 없기 때문에, 자기소외는 의식되지 않으며 결국 우리 몸은 파괴되어 간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한병철은 타자의 시간을 재발견할 것을 말한다. <에로스의 종말>과 <피로사회>에서도 비슷한데, 예리한 분석 뒤 나오는 아주 약간의 인간적이고 희망적인 내용을 말한다. 타자의 시간은 가속화 압박을 낳는, 성과와 효율성 제고의 논리를 벗어난다. 그래서 타자의 시간을 제거하는 신자유의주의적 시간 정책에 맞선 시간 혁명을 말한다. 시간혁명에 대한 구체적 내용은 없지만, 하이데거의 시간 개념과도 유사하다고 느껴진다.     

 전체적 소감은 정말 ‘한병철스럽다’라는 생각이 든다. <피로사회>와 <에로스의 종말>에 이은 세 번째 그의 문화 비평책인데, 주제만 다를 뿐 똑같은 이야기를 한다. 흔히 말하는 포스트모더니즘과는 다른 방향으로 암울한 포스트모더니즘을 말한다. <피로사회>에서 푸코의 권력사회의 종말을 선언했다면, <타자의 추방>에서는 타자화의 종말을 선언하며 추방을 말한다. 포스트구조주의자들보다도 더욱 무기력하면서도, 관념론적인 해결책-환대-를 주장한다. 특히 마르크스를 이론적 ‘살해’한 점 역시 흥미롭다. 마르크스의 시대-전통적인 착취와 소외 관계가 종식되었다고 한다. 성과사회-신자유주의는 착취가 아니라 아닌 자기실현, 자기최적화로 진행된다고 하는데, 물론 탁월한 분석인 점은 인정한다. 신자유주의에서 비중이 높은 것은 ‘자기 소외’라는 점은 맞으면서도, 마르크스의 소외이론에 벗어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를 색다른 포스트구조주의자라고 부르는 이유도, 결국 마르크스를 살해한 뒤 정치적 혁명이 불가능하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글쎄, 신자유주의의 ‘타자의 추방’에 맞서는 방법이 환대와 시간혁명일까? 지배 계급이라는 타자에 맞선, 유일한 사회 변혁의 주체적 계급인 노동 계급의 투쟁이야말로 착취와 억압의 주체인 ‘타자의 추방’을 실행한 뒤, 공존할 타자에게 환대하는 것이다. 그의 환대개념이야말로 억압자들이 존재하는 한 너무나 연약한 개념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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