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진단서를 제출할 일이 있어서 선생님께 요청을 했다.
손에 들린 진단서를 통해 상세한 병명과 코드를 처음 봤다.
"중증도 우울증"
질병코드 F32.1
낙인처럼 느껴졌다. 넌 그런 사람이야 탕탕탕.
정신과의 진입장벽을 높게 한다는 그 이름도 유명한 F코드 (C로 시작하는 것은 ‘암’이라고 한다)
F32 : 우울 에피소드 Depressive episode
전형적인 경도, 중등도, 중증 우울병 에피소드에서 환자는 기분의 저하, 정력 감퇴, 활동력 감소를 받게 된다. 흥미, 즐거움이 감소하고 집중장애와 최소한의 노력에도 심한 피로감을 느낀다. 잠을 잘 자지 못하며 식욕이 없고 자부심이나 자신감이 결여되고 죄책감이나 가치 없음도 느낄 수 있다. 기분저하의 정도는 매일 다르며 환경에 좌우되지 않고 흥미나 즐거운 감정의 소실, 평소보다 몇 시간 먼저 일어나기 등의 소위 “신체적” 증상이 동반된다. 우울병은 아침에 더 심하고 뚜렷한 정신운동 지연, 안절부절, 식욕 소실, 체중감소, 성욕감퇴가 동반될 수 있다. 위와 같은 증상의 심도와 수에 따라 우울병의 에피소드는 경도, 중등도, 중증으로 나뉜다.
F32.1 중등도 우울 에피소드 : 환자는 보통의 생활을 계속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있다.
우울증 진단 후 치료를 해가며 정신을 되찾고(?) 서둘러했던 일은 놀랍게도 자주 연락을 하던 지인들에게 알리는 일이었다. 그간 알게 모르게 나의 우울증 증상들로 인하여 오해 아닌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 같은 찝찝함에.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 좋지 않은 표정들과 자꾸만 시선을 피했던 것은 네가 불편해서 그런 게 아니라 내 마음이 불편해서 그랬던 것이었노라고.
위로를 받고자 말했던 것은 아니었으나 , 말을 하는 과정에서 위로가 되었던 시간들도 있고 또 음? 뭐지??????? 싶었던 물음표 같은 순간들도 있었다.
신랑은 그냥 나를 받아들여줬다. '감기 걸렸으니까 약 먹는 거라고 생각하지 뭐- ' 라며 무덤덤히 이야기를 해주었던 게 너무 고마웠다. 특별하지도 이상하지도 않게 그냥 그렇게.
생각해보면 우울증은 왜 "의지 없음"과 연결이 되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지금은 전업주부이지만 이전에 고혈압/당뇨 관련해서 강의도 하고 상담도 진행했었는데 방문하는 환자들에게 늘 운동/식이/약 복용을 강조했었다. 혈당을 낮추기 위해 당뇨약을 먹기도 하고 직접 인슐린을 주사하기도 한다. 인슐린이 부족해서 (혹은 저항성이 생겨서) 당뇨가 오는 거랑 뇌 호르몬 불균형으로 우울증 오는 게 뭐 다르다고? 뇌 호르몬을 안정적으로 맞추기 위해서 뇌 호르몬 약을 먹는 것이!!!! 왜!!!! 그렇게 이상하게 치부되어야 하는 것일까? 당뇨환자들에게 "으이그! 의지가 없으니까 당뇨가 오는 거지!"라고는 말도 하지 않을뿐더러 "으이그! 의지 부족으로 그렇게 혈압조절이 안되는 거예요!!!!" 이런 말 또한 어불성설 아닌가?
하아 , 의지 없는 사람으로 손가락질받기엔!!! 억울하고 또 억울하다!!!!!!!!
그래서 억울한 마음도 풀어볼 겸 겸사겸사 블로그에 글을 올렸다. SNS으로 알고만 지내던 분이셨는데 어려우셨을 텐데 본인의 우울과 공황 이야기를 하시며 내가 더 나아질 수 있을 거라고 날 응원한다 댓글을 달아주셨다. 정말로 더 나아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친구 J 에게서 손편지가 도착을 했다. 손편지를 받는 몽글몽글한 감정이 나에게 작은 기쁨이 되길 바란다며 꾹꾹 펜을 눌러 적어 보내 주었다.
친구 C 에게서 잊을 만하면 연락이 와서 괜찮냐 안부를 물어준다. 어느 날엔 갑자기 아이스크림 쿠폰을 보내주면서 산책하면서 하나씩 사 먹으라고 했다.
오랜만에 전화 온 지인 H는 같이 약 먹는 사이라며 서로가 서로에게 진한 정신과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연락이 끊겼던 L언니에게는 바로 전화가 왔다. "야 너 무슨 일이야!!!" 라며. 통화한 지가 한 참되었던 것 같은데 한결같은 목소리로 안부를 물어주었다.
그중 최고는 친구 D였다. 오랜만에 전화를 했고 다짜고짜 "나 우울증이래 - "라고 질러버렸다.
덤덤하게 말을 이어가는 D. 본인 또한 이래저래 한 이유로 약을 복용하고 있으며 "야 , 자살률 1위인 나라에서 정신과 약 먹는 게 대수냐? 자살 안 하고 약을 먹고 치료받는 게 사실 다행 아니야?" 라며 이야기해서 서로 한참을 웃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약을 먹으며 현타가 오는 날이 간혹 있는데 , 그런 날은 친구 D의 말을 되뇐다. '그래 죽지 않고 약 먹는 게 더 다행인 거지 뭐'. 그리고 친구 D와는 종종 통화를 하는데 "살아있니?"라는 인사로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시댁에는 알리지 말아 달라 했지만 어쩌다 보니 어머님이 알게 되셨다. 아이 둘을 데리고 신랑이 시댁에 갔던 날 병원을 다녀왔다. 선생님은 치료가 순조롭다 이야기하셨고 , 나 또한 괜찮은 기분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나쁘지 않은 날들이 이어졌다. 그래서 어머님께는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아 전화를 했다.
"어머님 , 아이 둘만 보내서 죄송해요. 그리고 어머니 저 많이 괜찮아졌대요. 지금처럼 약 잘 먹고 하다 보면 더 나아질 것 같아요"
그러자 어머님은 잠시 침묵하시더니 "고맙다" 고 이야기를 이어가셨다.
'고맙다'는 말이 낯설었다.
내가 나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건네 보았는데 참 낯간지러웠다. 우리 집은 11층이었는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절대 창문을 열고 아래를 오랫동안 보지 않았고 , 아이를 안고 서있지 않았다. 나도 내가 못 미더웠기 때문에. 그 시간들을 잘 견디고 살아내 줘서 고맙고 , 열심히 치료의 과정을 밟는 내게 고마웠다. 더 괜찮은 날들을 살아 낼 수 있을 것 같다. 혹여나 또 이런 겨울이 오더라도 한번 겪었던 겨울이기 때문에 겨울 대비를 짱짱하게 할 수 있으니 더 수월하지 않을까. (아마도)
종종 악의 없는 말로 찔린 적이 있었는데 단연코 그중 최고의 말은 "힘내.. " 그리고 "엄마가 먼저 행복해야 해" "편해서 그래"라는 이야기였다. 악의가 없는 말이기 때문에 흘려보내고 싶어도 한동안 귓가를 맴돌았다. 벗어나고 싶어도 참 어려웠다.
몇십 년을 알고 지낸 친구가 있는데 오랜만에 카톡으로 연락이 돼서 서로 근황을 묻다가 우울증 약을 먹고 있노라고 했다. 뭐 자랑은 아니지만 서로 슬프고 기쁠 때를 공유하는 사이였기 때문에 툭하고 이야기가 나왔다. 괜찮냐며 짧게 이야기가 오고 갔다. 이게 무슨 관종 심리인가 싶지만서도 며칠이 지나도 전화를 주지 않는 친구에게 조금 삐친 것 같다. 내심 섭섭했다.
신랑에게 이야기하니 복잡하게 산다며 고개를 절레절레한다. 그럼 당신이 그 친구에게 카톡으로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면 어떻게 할 건데?라는 질문을 들었다. 그러게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곧장 찾아갔겠지. 좋아할 만한 간식거리 싸들고.
서른 중반을 넘어가면서도 이런 섭섭한 마음이 드는 걸 보니 , 철이 들려면 아직 먼 것 같다.
우울증을 겪어가며 , 타인의 아픔을 어떻게 공감해주어야 할지 배워간다.
경청(傾聽)이라는 단어의 ‘경’자는
기울다, 란 뜻이죠.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들어줄 사람이 있다는 것은
다음 문장을 쓰게 하는 힘이 됩니다.
사람을 뜻하는 ‘人(인)’이라는 글자도
서로에게 기울어져 기대어 선 모양입니다.
귀를 기울이고
술잔을 기울이고
심혈을 기울이고
주의를 기울이고
정성을 기울이고
마음을 기울이고
그러다 0의 기울기가 되어 눕게 되는 것이 한생이려니 합니다.
- <나는, 당신에게만 열리는 책>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