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치료260일.
종종 과거에 얽매여 있지 말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이제 그만 그곳에서 나오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게 , 나도 앞으로 나가고 싶다. 문득 드는 생각들에 잠겨버리는 것 보단 과거의 내가 쌓여서 오늘의 내가 된 게 못마땅한 것 같다. 바꿀 수 없는 과거를 후회하는 것 같다. 오늘의 나를 잘 꾸려가며 미래의 나는 좀 더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은데 참 쉽지가 않다.
나는 내가 여전히도 못마땅한 것 같다. 고민이 많으면 책을 뒤적이는 타입이라 이번에도 이 책 저책 뒤적이다가 김혜남 선생님을 알게 되고 김혜남 선생님의 책 덕분에 여러 심리학 책들을 책에게 소개받게 되었다.
행복을 묻는 당신에게라는 책에는 애도를 통해서만이 과거의 상처와 이별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애도?애도라는건 누군가의 죽음 이후에 하는 것 아닌가?
여기서 말하는 애도란 무엇일까.
상처 입은 어른은 자기의 어린 시절과 부모의 상실을 애도해야 한다. 이 애도야 말로 자기 어린 시절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감정 해소의 종착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린 시절의 동기 좌절을 애도하는 과정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이 고통스럽고 슬플 수 있다. 단 한 번도 아버지에게 칭찬받은 기억이 없는 딸이 아버지에게 칭찬받기를 포기하는 것, 학교에서 억울하게 도둑으로 몰린 아들을 끝내 믿어주지 않았던 어머니로부터 ‘너를 믿는다’는 말을 듣기를 포기하는 것이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하지만 제대로 슬퍼하지 않고서는 상처와 이별할 수 없으므로 애도는 불가피하다. 좌절된 어린 시절의 동기와 이별하는 것은 인생에서의 새로운 출이자 전진이다. 왜냐면 그것을 통해서 건강한 동기를 새롭게 가질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어린 시절의 상처가 있다> 김태형
‘언젠가는 엄마가 바뀌어서 더 공감적인 반응을 해줄 거야’ 이와 같은 소망은 포기하기 힘들다. 하지만 나의 편지를 읽고도 엄마가 바뀌지 않을 때, 완벽한 사랑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좌절되었을 때, 극심한 슬픔과 좌절이 찾아온다. 이러한 커다란 슬픔과 상실감을 받아들이고 무의식적 소망을 서서히 포기해가는 과정, 이것이 애도의 단계다. 애도의 단계를 거치면서, 슬프지만 이제는 내가 얻을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내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 얻을 수 있는 현실의 만족도 맛보게 된다. 어린 시절의 상처와 좌절에 몰두하던 인생에서 시선을 돌려, 불완전한 나와 엄마를 현실적으로 바라보고 인정할 수 있는 인생으로 변한다. 실망과 집착과 원망을 벗고 비로소 독립된 나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누구의 인정도 아닌> 이인수, 이무석
우울증 치료 9개월이 되어가는 이 시점에 내게 필요로 되는 건 ‘과거와의 직면과 애도 그리고 독립’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먼 훗날 아이가 아빠로부터 받은 사랑을 떠올릴 때면, 여름날 두 손에 닿던 뭉근한 땀의 감촉으로 시작하길 바랬다.
<우리는 책의 파도에 몸을 맡긴 채> 김영건
내가 엄마로부터 받은 사랑을 떠올려봤다. 내게 엄마의 사랑은 어떤 의미일까.
어렸을 땐 외할머니와 함께 살면서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셨다. 늦게 들어오시는 엄마와 아빠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저 빨리 와서 내게 곁을 내어주었음 했던 것 같다. 초등학교 후반기에는 IMF로 외화벌이에 나선 부모님을 친가에서 오랫동안 기다렸다. 어서 한국으로 돌아오길. 춥고 매서운 이곳에서 나와 동생을 데리고 나가주길 바라고 또 바랬다. 대학생이 되고 집에서 차로 2시간 정도 걸리는 곳에서 자취를 하게 되었다. 그 무렵 생리통이 지독했던 나는 한 달에 한 번은 고꾸라져서 응급실에 실려가는 신세였는데 , 엄마에겐 늘 미안스러웠지만 생리통으로 응급실에 갔다는 소식을 전하면 2시간이 되기도 전에 달려와주는 엄마가 너무 좋았다. 거친 호흡을 내쉬면서 따듯한 손으로 내 차디찬 발을 잡아주는 엄마가 그렇게 좋았다.
그러니 내게 있어서 자연스럽게 사랑이란 정의는 서둘러 돌아와 날 안아주는 것으로 귀결된 게 아닐까.
더불어 외가, 친가를 두로 돌아가며 살았기 때문에 늘 물건들이 뒤엉켜있었다. 분명 내 것인 것 같지만 내 것 같지 않은. 그 덕분 일까 , 공간에 대한 애착이 있다. ‘집을 사야지!’라는 결론이었다면 참 좋았겠지만..(눈물 좀 훔치고 가자..) 사람 사는 것 같은 따듯한 공간을 만드는데 애를 쓴다.
어쩌면 나의 아이들을 키워가며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나의 집을 가꾸고 전업주부로 아이들에게 곁을 내어주는 건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다.
아이를 낳고 언제부턴가 친정엄마의 존재를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아이 둘을 키워내는 건 부부 둘이서만 해내기엔 벅찬 순간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혹여나 신랑은 출근을 했고 아이가 심하게 다쳐서 수술을 하러 가야 한다거나, 내가 심한 감기 몸살로 아이들을 돌봐줄 여력이 되지 않다거나 등 손길이 필요한 순간들이 많이 때문에 종종 엄마의 도움을 받았다. 나의 엄마는 약 16년 경력의 보험왕이기 때문에 몹시도 바쁜 스케줄을 가지고 살아가신다. 약속도 많고 급하게 들어오는 계약들도 확인해야 하고 수시로 전화를 받아야 하고. 그런 엄마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전화를 한다는 게 참 염치가 없다는 생각이 들지만서도 당장 어쩔 수 없어서 통화버튼을 누른다.
그런데 그때 , 거절은 아니지만 거절의 느낌이나 어쩔 수 없이 왔다거나 혹은 약속된 시간보다 늦게 오시면 그게 그렇게 참을 수 없이 마음이 일렁였다. 생각해보니 과거의 잔불이 아직도 남아 있는 날들이었던 것 같다. 수많은 갈등이 생겼다. 너무 고마운 날들이 넘치고 넘치는데 못된 생각에 잠겨있는 나를 용서할 수 없었고 , 너무 바쁜데 어쩔 수 없이 왔다는 뉘앙스의 이야기를 들으면 ‘내가 짐덩어리가 되었나?’ 하는 양가감정이 날 괴롭혔다.
서른이 넘어 우울증이 깊어졌다 좋아졌다를 반복했다. 가해자는 없이 피해자인 ‘나’만 남은 것 같았다. 왜 상처를 준 사람은 없는데 상처를 받은 것 같은 나는 남아 있는 걸까.
부모나, 형제, 배우자 등 내가 ‘가해자’로 인식하는 상대에 대한 분노 폭발이다. (중략) 과연 나는 순수한 피해자이고, 상대는 순수한 가해자일까? 여기서 우리는 ‘책임’을 만나야 한다. 어빈 얄롬은 “비난이 끝나고 책임이 떠오를 때 치료는 시작된다”라고 말한다. 왜 나에게도 책임이 있는 걸까? 상처가 발생했을 당시에 내가 느낀 분노와 열등감 수치심, 모멸감은 옳다. 하지만 그 뒤에 감정을 억압시키기 위해 택한 생존 방식은 나의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부모의 태도가 상처로 느껴진다면 내가 상처받고 있다는 걸 인정해주고 더는 그 상처에 노출되지 않도록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그게 나라는 존재에 대해 내가 책임지는 태도예요.
<행복을 묻는 당신에게>-김아리 엮음
니탓 내 탓을 나누는 것처럼 치졸(?) 한 것이 없지만 , 실패한 것만 같은 내 인생을 부모님 탓으로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내 스스로 삶을 실패했다고 생각한 것 같다. 왕따를 당했던 것 , 1-3년 주기를 오가는 조각 경력의 간호사의 삶, 우울증인 나. 내 탓이라고 하기엔 무서웠던 것 같다.
그러나 너는 너의 삶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여러 심리학 책에서 내게 이야기했다. 과거는 과거이고 , 과거 탓 남 탓 이제 그만하고 성장하라고 한다. 어른이 되라고 한다.
선택하고 결정하고, 그 결정을 감당하고 책임지는 삶이다. 선택을 남에게 미루거나 의존하지도 않으며, 그 결과에 남 탓을 하거나 책임을 피하지도 않는 삶이다. 어른이 되지 못한 사람들에게 자율성과 책임은 버거우며 실패는 공포스럽다. 그들은 선택을 의존하고 결과는 회피한다. 어린 시절 형성된 미성숙한 생존 방식에서 성숙한 생존 방식으로 바뀌는 것, 그것이 어른이다. 선택과 책임, 독립과 성장이야말로 어른의 키워드다.
<행복을 묻는 당신에게>-김아리 엮음
부모님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기로 결심했다. 서운하고 섭섭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거리를 두기로 했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당연히’라는 걸 바라지 않기로 했다. 당연히 날 도와주어야 하는 책임은 부모님께 없다. 내가 선택한 내 삶에 대한 결과들에 내가 책임을 지고 나아가야 한다. 아이가 다쳐서 병원을 가야 한다면 엄마가 도와주시면 감사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둘 챙겨서 (내 정신머리도 잘 챙겨서) 택시 타고 가서 내 짐을 짊어지면 되는 거다. 그게 엄마로서의 내가 해내야 하는 일들이니까. 과거의 감정에 엮여서 현재까지 엉망으로 만들지 않기로 결심해본다.
내가 말하는 ‘거리’는 상대방과 나 사이에 ‘존중’을 넣는 것이다. 이때 존중은 상대방이 나와 다르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을 뜻한다. 그가 나와 다르다고 해서 그를 비난하거나 비판하지 않고 고치려고 들지 않는 것이다. 즉 상대방을 내 마음대로 휘두르려고 하지 않고 그의 선택과 결정을 존중하는 것이다.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사람을 대할 때는 불을 대하듯 하라. 다가갈 때는 타지 않을 정도로, 멀어질 때는 얼지 않을 만큼만”이라는 말을 남겼다. 서로 덜 상처 주면서 살고 싶다면, 관계로 인해 더 이상 괴롭지 않고 행복해지고 싶다면 거리를 두어라. 둘 사이에 간격이 있다는 것은 결코 서운해할 일이 아니다. 그것이 얼마나 서로를 자유롭게 하고 행복하게 만드는지는 경험해 보면 바로 깨닫게 될 것이다.
<당신과 나 사이> - 김혜남
나도 엄마도 한 사람으로서 ‘미성숙’할 수 있음을 인정하고 거리를 살짝 두고 거기에 ‘존중’을 넣을 수 있도록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빨리 와서 곁에 있어주는 것만이 사랑이 아니라는 걸 되뇐다.
그렇게 몇 주가 흘렀을까.
크게 변한 것 없는 사이인데 , 편안함이 찾아왔다.
가끔 들러 아이들 옷과 반찬을 주는 엄마가 너무 고마웠다.
남편은 출근을 하던 날 아침. 감기 몸살이 심하게 와서 도움을 요청했다. 세 시간이 훌쩍 지나서 집에 온 엄마의 손에는 먼 거리에 있는 약국의 감기에 기가 막히게 잘 듣는다는 ‘약’한 봉지와 죽이 들려있었다. 예전에는 ‘늦게’ 왔다는 것에 부루퉁했을 텐데 , 이제야 그 속에 있는 엄마의 사랑이 보인다. 철이 없던 걸까 , 아니면 우울증이 심했던 걸까 혹 그게 아니면 배가 불렀던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내면 아이가 여전히도 울고 있던 걸까.
헤르만 헤세는 말했다.
나를 덮친 외적인 운명이,
모두에게 그렇듯 피할 수 없고
신에게 달린 일이라면
나의 내적 운명은
나만의 고유한 작품이었다.
그것의 달콤함도 씁쓸함도
오로지 내 책임이다.
내 삶에 책임을 지는 어른이 되어가는 중이다.
아마 , 우울증이 아니었다면 이런 걸 돌아보지 않았으리라.
나만의 어여쁜 고유한 작품을 만들어가야지.
사랑하는 나의 엄마 ,
늘 이야기 하지만 내가 마음이 아픈건 엄마탓이 아니야. 내가 탓할 사람이 필요했던 것 같아. 과거의 일들이 무수한 결정들을 하고 살아가는데 물론 영향을 미쳤겠지만 어떻게 백프로 영향을 미쳤겠어. 힘든일들을 피해다니고 싶었던 욕심들에 내가 내린 결정들이었는데 말이야. 그리고 최선의 방법들로 날 사랑하려했던 엄마의 노력을 몰라서 미안해.
늘 사랑하고 오랫동안 건강히 곁에 있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