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치료 9개월. 예쁨과 아름다움에 대하여.
어렸을 때의 나는 단발과 커트머리를 오고 갔다. 거기에 키가 작은 편은 아니었고 가슴이 좀 큰 편이라 또래에 비해 조숙한 편이었다. 초등학교 졸업 무렵 달리기를 하고 있던 중에 '지방덩어리가 흔들린다'라고 수군거리는 아이들의 이야기에 어깨를 움츠리기 시작했다.
중학교 때는 머리규제가 있어서 늘 단발이었고 , 중학교 졸업 무렵에는 신화오빠님들한테 빠져서 머리모양마저 비슷하게 유지하고자 짧은 커트를 쳤었다. 그리고 올라간 고등학교에선 시험이 망할 때마다 따로 스트레스를 풀 방법을 도저히 모르겠어서 애먼 머리만 계속 잘라댔다. 머리를 자르기 힘들 정도로 짧을 땐 , 귀걸이와 피어싱의 개수를 늘려갔다. 이렇게 적고 보니 좀 자학적인 면이 없지 않아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 초등학교 때부터 버릇처럼 움츠리던 어깨는 좀처럼 펴지지 않은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좀처럼 모르겠었다. 어느 날은 자학적으로 머리를 짧게 잘라놓곤 , 타인이 보는 시선이 두려워서 눈을 내리깔고 걸었던 날들도 있었다.
20대 후반.
결혼을 결심하면서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웬걸? 결혼식다이어트와 함께 머리가 낭창낭창 길어진 나의 모습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살면서 처음 해봤던 생각이었다.
스스로를 늘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내게는 큰 사건이었다.
내가 예뻐 보이다니?????
‘예쁨’에 대한 갈망은 늘 있었던 것 같다. 좀 더 가녀리고 예뻤다면 왕따는 안 당하지 않았을까? 좀 더 재밌게 살 수 있을 것 같았을 텐데? 자존감이 낮으니 외적인 걸로부터 보상을 받고 싶었던 묘한 심리였던 것 같다.
결혼 후 운동과 식이조절에 더욱 심혈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빈속에 하는 운동, 즉 공복운동은 살 빼기에 최적화되어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거르지 않고 매일 했던 것 같다. 체중이 빠지고 근육이 자리를 잡아가니 스포츠브라에 레깅스만 입은 모습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생당시에도 떡두꺼비였던 나는 이런 길쭉한 몸을 가져본 게 처음이라 점점 나에게 취해가는 것 같았다. (어우 ㅋㅋㅋㅋㅋ 글을 적으면서도 창피하네 ㅋㅋ) 더불어 강박적인 사고가 고착되어 갔다. 종종 들려오는 예뻐졌다는 이야기에 나를 더욱 몰아붙였다.
그러다 임신을 했다.
체중의 앞자리가 2번 바뀌었다.
아이를 낳고 보니 몸이 많이 망가져있었고 ,
머리숱은 저 나락으로 가버렸다.
그럼에도 긴 머리만큼은 놓지를 못했다. 이것마저 짧게 잘라버리면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리는 기분이 들 것 같았다. 아이를 낳고 낮아진 신체자존감은 그나마 나의 기나긴 머리카락이 붙들어 주고 있었다. 그러나 머리카락은 계속해서 빠졌고 온몸의 피부가 뒤집어지면서 두피마저 이루 말할 수 없이 엉망이 되어버렸다.
울며 겨자 먹기로 마지노선인 어깨길이정도로 커트를 했다.
살이 다 빠지지 않은 채 둘째 임신을 하게 되었고 , 몸무게는 금세 첫째 만삭 때의 몸무게가 되어버렸다. 한번 늘어났던 배는 좀처럼 멈출 줄 모르고 앞으로 한없이 나왔다. 등은 점점 굽고 안 그래도 콤플렉스였던 가슴은 한없이 부풀어 올랐다.
이런 내 모습이 싫었다.
둘째를 낳고 나의 삶은 더욱 바쁘고 정신이 없어졌다. 그러다 보니 나를 '가꾼'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할 시간들이었다. 화장실에서 똥이라도 한번 시원하고 편히 보면 다행이라 여길 정도였으니.
점점 바스락 소리가 날 정도로 메말라가고 있었다.
누가 밟기도 전에 바람이라도 한번 불면 바삭-하고 흩어질 것 같았다.
눈동자엔 빛을 잃어갔고 이젠 날 사랑하는 법뿐만 아니라 가족을 포함한 타인을 사랑하는 법 조차 기억이 나지 않기 시작했다.
2022년 3월에서 4월로 넘어가던 계절.
우울증을 진단받고 치료를 시작했다.
치료가 진행됨에 따라 삶에 활기를 다시 띄기 시작하고 아이들과 남편 그리고 나 자신을 보듬을 힘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하게 된 건 머리를 짧게 잘랐다. 이번엔 잘라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린 게 아니라 스스로 하고 싶은 머리가 있어 짧게 잘랐다. 별것 아닐 수 있지만 내겐 정말 큰 결단이었다.
커트단발이라니.
이동진 평론가의 <밤은 책이다>에서 그가 빨간 안경을 쓰게 된 날의 일화가 적여 있다.
쓰던 안경테가 부러져서 동네 안경점을 찾았습니다. 이전처럼 검은색이나 갈색의 뿔테 혹은 은테 안경들을 진열대에서 훑어나가는데 갑자기 빨간색 뿔테 하나가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튀지 않는 안경테 몇 개를 걸쳐보며 거울을 보다가 그 빨간 테도 슬쩍 써보았어요. 거울 속의 제 모습은 낯설었지만 한편으로는 새롭게 보이기도 하더군요. 하지만 곧 빨간 테를 벗어서 주인에게 돌려주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튀는 안경테를 어떻게 써?’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지요. 중학교 2학년 때 이후로 오랜 세월 안경을 써왔지만, 한 번도 평범한 안경테에서 벗어나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이어서 ‘왜 안 돼?’라는 반문이 스스로 들더군요. 직장까지 그만둔 상황에서 대체 누가, 무엇이 신경 쓰이길래 쓰고 싶은 안경테도 못 사는가, 싶었던 것이지요. 결국 과감하게 그 안경테를 샀습니다. 그리고 제가 우울한 나날들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은 그 직후의 일이었습니다. 변화의 순간은 일종의 의식儀式을 필요로 할 때가 많은데, 말하자면 제게 그 의식은 빨간 테 안경을 사는 일이었던 셈이지요.
오랜 수행 끝에 인생관을 신념의 힘으로 바꾼 것도 아니고, 새로운 미래를 맞이하면서 심기일전하느라 세계일주를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안경테 하나를 바꿨을 뿐이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튀는 안경을 소화하는 작은 용기와 작은 의지는 곧 세상에 대한 저의 태도에 작은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고, 그 작은 변화는 결코 작지 않은 또 다른 연쇄적 변화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어디, 안경만 그렇겠어요.
삶에서 변화란 원래 그렇게 아주 작은 것을 바꾸는 것으로부터 찾아오는 게 아닐까요.
- <밤은 책이다> 이동진
그저 내가 선택을 해서 치렁거리던 머리를 잘랐을 뿐이다.
이동진 님의 말을 인용하자면 , 짧은 머리를 소화하는 작은 용기와 작은 의지가 곧 세상에 대한 나의 태도에 작은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고 그 작은 변화는 결코 작지 않은 또 다른 연쇄적 변화로 이어졌다.
타인이 바라보는 ‘내’가 아닌 ,
내가 바라보는 나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저 머리 좀 자른건데?
마음이 가벼워졌다.
<고양이처럼 아님말고/남씨> 에 나오는
일러스트가 생각이 났다.
캣썅마이웨이 일러스트를 보며 엄청 웃었는데 , 돌이켜보니 나쁘지 않은 워딩인 것 같다. 짧아진 머리가 종종 어색해지는 날과 타인의 시선이 묘하게 겹치는 날은 속으로 외쳐본다.
"캣썅마이웨이"
깨발랄하고 개구쟁이 같지만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인생이 다큐인 여자. 사뭇진지하게 궁서체로 사는 사람.
타인에 의한 것이 아닌 내가 나를 빚어가고 있다.
그래, 이게 나다.
그저 머리카락을 좀 잘랐을 뿐인데 , 한걸음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제법 셀카도 찍고 , 남편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요청을 하기도 한다. 타인을 만나는 자리에서는 어깨를 펴고 활짝 웃으면서 단체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아름다움’과 ‘예쁨’은 내게 서로 다른 의미다.
아름다움이란 어디에나 있는 것이다. 석양은 아름답다. 사람 사이의 만남은 아름답다. 다정함은 아름답다. 몸은 아름답다. 모든 몸은 아름답다. 아름다움은 도처에 존재하고 , 누구에게서나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외면이든 내면이든 아름다울 수 있다.
반면 여성의 외모를 묘사할 때 쓰이는 “예쁨”이란 기업들이 만들어낸 신체적 이상으로, 당신이 예뻐지기 전까지는 불완전한 사람이라고 믿게 만다는 개념이다. 예쁨은 그들이 당신에게 세뇌시킨 것이다. 예쁨은 여성들이 서로 싸우게끔 하는 원인이다.
예쁨은 돈에 굶주린 개새끼들의 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만들어진 거짓말이다.
그러니까 예쁨은 썩 꺼져라.
원래 우리의 것인 아름다움은 되찾자.
<나는 뚱뚱하게 살기로 했다> -제스베이커
예쁨은 그만 쫓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기로 결심해 본다.
서로 위로가 필요한 날엔 적당한 야식도 먹고 , 어깨결림을 위해 어깨운동도 시작했다. 팔근육이 부족하여 육아와 가사가 힘들어서 맨몸운동도 시작했다. 마음과 몸을 잘 가꾸어가야지.
아름답게 늙어가야지.
그러니 당신, 오늘도 참 아름답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