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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맹수봉 Jan 05. 2023

생일날 미역국을 끓이지 않겠노라 선언하였다

우울증 치료 280일.


 2022년 12월 22일

우리 집 작은 친구가 두 돌이 되었다.


그리고 2022년 12월 28일

우리 집 큰 친구의 다섯 번째 생일이었다.


12월만 되면 축하레이스가 펼쳐져 정신이 아득해진다.



"작은 친구 생일 - 예수님 생일 - 큰 친구 생일"



마음상태가 괜찮을 때는 상관이 없지만 , 우울증 전후로 해서는 기운이 쭉 빠지고 부담감이 겹겹으로 쌓이는 일이 되어버렸다. 해야할 것들이 많으니까.


그래도 확실한 것은 치료를 받기 전, 그러니까 작년 연말보다는 많이 괜찮아졌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묘한 마음이 든다.


"나도 축하받고 싶은데?"

"애는 내가 낳았는데? 나 너무 아팠는데?"

“뭔가 인정받고 싶은데????”


아, 철딱서니 없는 생각.



나의 아이들이 '어머니 저를 꼭 낳아주십시오' 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함께'하는 파티가 하고 싶었다.


낳아진 사람도 기쁘고

낳은 사람도 기쁘고



요리를 하는 행위자체가 ‘노동’으로 여겨져서 썩 즐기지 않기 때문에 , 아이들을 낳는 큰 노동을 했던 날만큼은 하기 싫은 건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 , 난 요리가 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삼시 세 끼는 어쨌든 차려내야 하고 , 외식으로 다 돌려버리자니 외식비도 어마어마하고 ..무엇보다 우리 집 큰 친구가 아토피가 있어서 외식을 하면 마음이 좋지 않다. 어쩌면 좋단 말이냐.


"그래 결심했어. 생일 당사자가 먹고 싶다는 것만 해주자"


이 정도 선까지는 괜찮을 것 같았다. 미역국을 끓이지 않겠노라 선언을 했고 , 생일날 먹고 싶은 것을 말해주면 그걸 해주겠노라 하였다. 뭐 미역국이 먹고 싶다면 미역국을 끓여주고.


이게 맞나? 싶지만 맞고 틀리고 가 어디 있을꼬. 그냥 우리 가족이 그렇게 하면 그렇게 하는 거지 뭐.


작은 친구의 생일이 찾아왔다.  


남편은 새벽출근을 하고 새벽퇴근을 하는 날이라 , 작은 친구의 생일 다음날 케이크를 함께 자르고 밥을 먹기로 했는데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친정엄마가 극대노를 하셨다.


생일은 지나서 챙기는 거 아니라고?


고민을 하다가 급하게 떡 몇 가지를 배달시켜 케이크를 만들어 초를 불어주었다. 사진을 몇 장 남겨주고 싶기도 했고, 마침 아이랑 먹을 간식이 없기도 했었고.



점심으로 아이가 좋아하는 볶음밥을 해주니 맛있게 한 그릇을 비웠다. 미역국을 끓이지 않는다고 친정엄마에게 전하니 이건 아이를 위한 것도 있지만 아이를 낳은 당사자가 수고했기 때문에 먹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 , 그렇구나.


그렇다면 더더욱 미역국을 끓이지 않기로 결심해 본다.

한상을 거하게 차려내지 않기로 결심을 한다.

아이도 세상밖으로 나오느라 수고했지만 ,

세상밖으로 나오게 하느라 나도 수고했으니 모두에게 좋은 선택을 해야지.


마음이 불편하기는 하다.

아이가 조금 더 커서 서운해하면 어쩌지?

뭐 그건 그때 생각해보지 뭐.

일단은 내 마음이 조금은 편한 길을 선택을 해본다.


큰 친구의 생일날이 찾아왔다.


남편은 아침댓바람부터 생일축하 노래를 틀고 춤을 추며 특별공연에 열을 올렸다. 평소에 호들갑 떨면서 꽈악 안아주면 아프다며 별로 좋아하지 않던 아이인데 , 오늘은 잠자코 아빠의 호들갑을 받아주는 걸 보니 기분이 썩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아침엔 떡국을 먹고 , 점심엔 볶음밥을 해주었다.

여전히 마음 한편이 불편하기는 했으나 전날부터 장보고 지지고 볶고 음식하고 열정을 쏟아부어버리면 막상 아이에게 쏟을 정신머리가 없을 것 같아 스스로를 컴다운시켰다.


진정하자 진정해.


과하지 않게 ,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기쁘게 해내자고 다짐한다.


얼마전부터 친구들과 생일파티를 하고 싶다길래 나의 친구들을 불러 모았다. 친구들의 아이들 또한 나의 아이들과 또래가 비슷해서 함께 생일축하를 하고 같이 놀기가 참 좋았다.


작은 공간을 대여했다. 거기에 유기농케이크를 판매하는 곳에서 딸기케이크를 사가기로 했었으나 물가가 수직상승하여 38,000원이었던 것이 55,000원으로 올랐다고 하녀, 차선책으로 아이에게 무얼 먹고 싶냐고 물으니 평소에 못 먹던 초콜릿케이크를 먹고 싶다 하였다. 다행히 초콜릿케이크는 타격을 덜 받아 나름 아름다운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었다.


케이크 세팅을 하고 혹여나 모자랄까 싶어 유기농밀가루로 만든 롤케이크를 하나 더 사와서 그 위에 딸기를 얹었다. 사실 아토피 때문에 케이크먹이는 것도 좀 꺼림직스럽지만 아이의 먹는 행복과 아이의 아토피를 위한 선택의 적정선인 ‘유기농 밀가루’로 합의를 보기로 했다. (유기농 케이크도 아토피가 올라와서 긁지만 , 수입산 일반 밀가루로 만든 케이크는 더더욱 최악이다.) 그럼에도 마음이 불편하다. 밤새 가렵다며 긁을 것이 빤한데..


(이 정도면 프로 불편러..)


친구들과 함께 웃고 떠들며 주스도 마시고 케이크를 먹는 아이를 보고 있자니 웃음이 새어 나온다. 그래 , 아토피로 긁는 건 일단 나중에 생각하자. 당분간은 집밥 잘 해먹이면 또 들어가겠지.



그렇게 12월의 행사들이 지나갔다.

미역국을 끓여 거하게 한 상을 차려 생일자에게 대접해 주어야 한다는 것.

그 마음 하나 걷어냈을 뿐인데 몸과 마음의 에너지를 덜 소비하게 되었고 남은 에너지로 하루의 시간을 기쁨과 행복으로 더욱 충만하게 누릴 수 있던 것 같다.


생일엔,

생일자가 먹고싶은거 먹고 하고싶은거 하기.

왜 그걸 이제야 생각했을까.




다가오는 나의 4월 생일엔

아침으로 사과를 잔뜩 잘라 커피와 함께 먹고

점심으로 짱떡볶이에서

떡볶이와 오징어튀김을 사 먹고

후식으로 맹심커피에 가서

티라미슈와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저녁으로 월남쌈을 해 먹어야지.


엄마에겐 머리 큰 딸 낳느라 고생하셨다며 , 꽃다발과 케이크를 보내야지.


우울증 이전에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판에 박힌 듯 정형화된 삶을 살아갔었다.


약간 강박적으로.

이때에는 뭘 해야 하고 ,

또 이때에는 꼭 반드시 이걸 해야만 하는 식으로.


우울증 이후에는 그런 것들이 많이 깨졌다.

조금 더 편하고 알맞은 옷을 찾아 입어가는 중인 것 같다.




세상의 우울은
그림자에 불과하나니
우리 손에 닿는 곳에 기쁨이 있으니
기쁨을 안으라 !

<프라 지오반니>






작은 기쁨들을 꿰어가는 날들이 되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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