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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리 Sep 04. 2022

비가 내리고 케이크를 먹으면

 대학교 2학년 시절 여전히 아픈 마음이 쉬이 달래는 방법을 몰라 방황했던 그때, 내 방황을 덜 외롭게 만들어준 친구 K가 있었다. K는 당시 신체적인 어려움과 상황적인 어려움을 함께 겪고 있던 터라 나만큼이나 많은 것들을 이해하지 못했고, 또 그랬기에 우리는 자주 많나 세상살이의 어려움과 고독함의 회포를 풀었었다.


 당시 나는 학교에 재학 중이었지만 K는 학교를 그만두고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기에 비교적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차분하게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학교에서 강의를 듣는 와중에 K로부터 연락이 왔었다.

 ‘나 얼그레이 케이크가 정말 먹고 싶은데, 밖을 못 나가겠어.’


 핸드폰 잠금 화면 위로 떠오른 알람을 보고 한참을 고민했다. 오후 일정을 체크하고, 남자 친구와의 약속을 미룰 수 있는지 먼저 물어봤다. 남자 친구는 흔쾌히 괜찮다고 했으므로 나는 강의가 마치는 대로 서둘러 K의 집 근처에서 K가 가장 좋아하는 베이커리에 들러 작은 사이즈의 얼그레이 케이크를 샀다. 그런 후 한 손에는 우산을, 한 손에는 케이크 상자를 아슬아슬하게 들고 K의 집으로 멀지 않은 걸음을 뗐다.


 “정말 미안해.”

 초인종 소리가 울린 후 한참만의 문을 연 K가 가장 먼저 꺼낸 얘기는 미안하다는 말이었다. 평소 ‘역시 네가 최고야’, ‘진짜 너밖에 없다 친구야’ 뭐 그런 식으로 공치사를 하던 터라 민망한 얼굴로 다짜고짜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K를 보며 나는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놀란 기색을 감추고 얼른 세상에 그런 소리가 어딨냐며 오히려 쏘아붙였고, 우리는 더 이상 그에 관한 얘기는 하지 않기로 약속한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K는 작은 자취방에 손바닥 2개 만한 작은 상을 꺼내왔다. 그리고는 찬장에서 얼그레이 티백을 꺼내 뜨거운 물을 붓고 작은 상 위에 소리 나게 올렸다. 나는 그 옆에 케이크 상자를 올리고 케이크를 꺼내 다시 그 상자 위에 올렸다. 딱히 이유는 없지만 베이커리에서 초는 몇 개나 필요하냐는 말에 작은 것 두 개를 달라고 했기에, 상자 옆에 붙은 작은 초를 2개 꺼내 꽂은 후 불을 붙였다.


“불어봐.”

K는 여전히 민망하는 듯 작게 뭐야, 하고 중얼거리더니 이내 큰 숨으로 불을 껐다. 우리는 서로에게 맛있음을 확인하며 차를 마시고, 번갈아 포크질을 하며 맛있게 케이크를 먹어 치웠다. 그리고는 가만히 누워 창밖으로 쏟아지는 빗소리가 모자라다는 듯 ‘비 오는 날 듣기 좋은 노래 리스트’를 찾아 하나씩 듣기 시작했다. 노래 속에는 어김없이 비가 내리는 소리, 창가에 부딪히는 소리와 같은 듣기 좋은 소음이 배경에 깔려 있었다.


 조용히 생각했다. 비는 종종 알 수 없는 소리로 내리는구나. 선뜻 표현할 수 없는 그 어떤 몸짓과 같은 일말의 절망감으로, 푸르스름하게 내려앉은 구름을 등지고 억울하게 춤추며. 앞으로 우리는 그런 비를 얼마나 더 사랑하고 또 얼마나 더 원망할까? 언젠가 비 오는 날을 울지 않고 보낼 수 있을까? 이처럼 젊은 날, 쉬지 않고 비 내리던 시절을 떠올리면서.


 “빗소리 진짜 좋은 것 같아. 물론 비 맞는 건 싫지만.”

 K가 적막을 깼다.

 “맞아, 뭔가 심신이 안정되는 기분?”

 우리는 비 오는 날이 좋은지 그래도 맑은 날이 더 좋은지 같은 얘기를 나누다 역시 비 오는 날 집에 가만히 앉아 쉴 수 있는 날이 가장 좋다는 결론을 내렸다.


 “오늘 진짜 고마워. 나 정말 저 집 얼그레이 케이크가 너무 먹고 싶은데 도저히 못 나가겠는 거야.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낯선 사람과 마주치는 생각만 해도 주저앉아 버릴 거 같았어.”

 K가 속 마음을 털어놓자 나는 정말 괜찮다고, 사실은 나도 저 얼그레이 케이크가 먹고 싶어서 온 거니 너무 네 위주로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 말에 K가 먼저 머쓱하게 웃고 내가 따라 웃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K는 내게 그날의 이야기를 한번 더 꺼낸 적이 있다. 나는 거의 잊고 있었던 기억을 그날 다시 떠올리며 우리는 그날의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이 단단해졌음을 확인했다. K 또한 동의했다. 그때 우리는 유난히 여렸고 또 연약했음을. 작은 휘어짐에도 크게 휘청했으며, 눈에 띄게 날이 서 있었고 언제라도 넘어질 준비가 된 사람처럼 걸어갔음을 상기했다.


 “그래도 우리는 계속 약했다가도 강해지고, 또 잠시 약해졌다가도 더 강해지고 그러겠지?”

 K는 민망해도 할 말은 해야겠다는 듯, 눈 끝이 휘어지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말했다.

 “그럼. 7전8기래잖아. 넘어지고 또 일어서고, 그렇게 사는 거지.”

 “맞아.”


 우리는 또 같이 웃으며 창밖에 내리는 비를 바라봤다. 예보에 없던 비에 많은 사람들이 빠르게 걸음을 재촉하며 걸었고, 편의점에서 일회용 우산을 사서 나오는 사람들도 보였다. 다들 비에 회환과 같은 여러 감정을 쓸려 보내고 있었다. 우리는 큰길에 통창이 나 있는 카페 창쪽에 앉아 또다시 얼그레이 케이크를 먹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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