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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리 Sep 17. 2022

과거를 그리워하느라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돌아가고 싶은 순간을 차곡차곡 모은다면 90년대 한창 유행했던 비디오테이프 가게 중에서도 대형 규모만큼을 갖출 수 있을 것 같다. 좋았던 날들은 아직도 마음 한 구석에 고요히 자리한 채 깊은 향기를 풍기곤 한다. 다만 그 향기가 마냥 반갑지 않은 것은 그 기억들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순간이라는 애석한 진실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 나이를 먹는다는 것. 그런 모든 당연한 일들이 가끔 치명적 이도록 가슴 아프게 느껴진다.


 최근 코로나19 사태가 점차 완화되고 일상 회복 단계로 들어서면서 해외여행에 다시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따지고 보면 취업이다 뭐다 바쁘고 나서 바로 코로나19가 터졌고 자연스레 한 5년 정도를 국내 여행에 만족하며 보내야 했다. 꿩 대신 닭이라고 했던가, 닭만 있을 때는 꽤나 맛있게 느껴졌는데 새로운 선택지가 메뉴 위에 오르고 나서는 더 이상 닭에만 만족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런던이니 파리니 하는 도시들을 둘러보면서 어디로 떠날까 펜 끝을 굴리기 시작했고 동시에 지나온 과거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은가.


 벌써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22살의 어린 나이로 커다란 캐리어를 이끌고 5주 동안 유럽의 각국, 여러 도시를 추운 겨울에도 발에 땀이 나도록 걸어 다닌 것이 그토록 오랜 일이 되었다. 새삼 믿어지지 않았다. 나이를 속절없이 먹어가는 동안 나만 모르고 있었으며, 나만 변한 게 없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왜 시간은 한쪽 방향으로만 흐를까? 왜 지나온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을까? 누구 말마따나 시간을 더한 4차원의 공간에서 우리의 흐름은 결정되어 있고 필름을 재생하듯 한 방향으로 흐르며 인생이 흘러간다고 한다면 우리는 되감기 할 수 없는 비디오테이프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것 같다. 형용할 수 없이 아쉬운 마음이 새어 흐른다.


 나는 종종 만나는 사람들에게 “만약 딱 한 번만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느 시기로 돌아가고 싶어?”와 같은 질문을 한다. 이미 경험해 본 지루한 미래를 다시 경험해도 좋다는 생각이 들만한 선에서 인생의 가장 중요한 변화를 줄 수 있는 지점은 어디었는지 생각하게끔 만드는 질문이다. 내 스스로에게도 이러한 질문을 자주 던진다. 특히나 인생의 어느 시점부터는 나 혹시 ‘리셋 증후군’이 아닐까 싶을 만큼 자주 과거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만약 누군가 내게 와서 인생을 다시 살 수 있는 Reset 버튼을 딱 한 번만 누를 수 있는 기회를 줄 테니, 다시 돌아가고 싶은 순간을 상상하며 누르라고 한다면 나는 아마 수능이 끝난 직후를 상상하며 그 버튼을 누를 것 같다. (누르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적어도 내게는 없을 것 같다.) 상상 속에서 이런 결정을 내리고 나면 다소 진지하게 이전의 삶과는 어떻게 다른 삶을 살아갈 것인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대학과 학과를 바꿔야 할까? 만약 같은 학교 같은 과에 간다면 어떤 다른 방식으로 살아내야 할까?


 일단 더 많은 사람을 만나야지, 그리고 더 열심히 돈을 모으고, 주식을 일찍부터 시작해야지. 그래, 주식 공부도 하고 취업 준비도 미리미리 해놔야지. 너무 많이 울지 말아야지. 더 크게 목소리를 내고, 더 자유롭게 살아야지. 그렇게 내가 내 인생에게 원하는 것을 쭉 나열하다 보면 문득 아, 이런 것들은 지금도 충분히 할 수 있구나, 싶은 생각에 다다른다. 어디선가 들었던 말이 떠오른다. ‘10년 전에 했으면 좋았을 것들을 10년 후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바라고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부터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열심히 돈을 모으고, 주식을 공부하고, 너무 많이 울지 않으면 될 일이다. 그러니 나는 그저 그리운 것이다. 지난날의 찬란한 젊음이, 그 서툰 날들이. 다시는 경험할 수 없는 벅찬 감정과 한 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여러 경험들이 그리운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것은 점점 줄어들고 설렘이나 벅찬 감정을 느끼기 어려워지기 때문에 그런 모든 것들이 마냥 즐겁고 신기하기만 했던 젊은 마음이 다시 갖고 싶은 것이다.


 나는 아마 다시 10년 만에 런던이나 파리 같은 도시에 갈 것이다. 여전히 많은 것들이 아름답고 멋있게만 느껴질 테지만 10년 전 겪었던 감정을 다시 느끼긴 어려울 것이다. 오르세 미술관 속 미술 작품들의 경이로움을 나는 이제 알고, 루브르 박물관의 웅장함과 거대함을 이미 경험했다. 그 어느 도시의 풍경도 이미 내 머릿속에는 많이도 저장되어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처음처럼은 낯설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낯섦 대신 익숙함을 채워가는 것이 곧 인생일까.


 현재에 충만해서, 더 나은 미래를 만드는 것에 집중하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란 걸 알지만 지나온 아름다웠던 시절을 떠올리면 가슴 한켠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착각이 드는 때가 있다. 여전히 과거를 추억하고 그리워하는 데 나는 너무 많은 시간과 감정을 허비하고 있다. 현재의 나는 불행한가? 자꾸만 좋았던 날들을 떠올리고, 돌아가고 싶어 하는 나는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는가? 딱히 부정할 마음이 들지 않는다. 아마 그런 것 같다. 다시 마음이 무너져 내린다. 몇 년째 이 짓거리를 반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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