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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리 Oct 23. 2022

만추(滿秋)

 온 세상이 가을로 가득 찼다. 붉고 노란, 주황스러운 들쭉날쭉한 색감들을 뽐내는 단풍들 사이를 통과하는 가을의 햇살은 그 어떤 계절의 빛보다 진한 농도를 머금고 있다. 아름답다. 그러니 모순적이게도 가을은 가장 따뜻한 계절인 것이다. 낙엽은 춤을 추듯 알 수 없는 리듬으로 흩어져 내린다. 낮고 잔잔한 바람을 타고 멀리 날아가 버린다. 공기의 걸음걸이를 타고 쏟아져 내리는 낙엽의 자태를 보며 문득 이 순간을 가지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힌다. 마치 아름다운 선율의 피아노 소나타가 그 순간을 스치듯 흐르고 나면 누구도 이를 소유할 수 없는 것처럼, 가을날의 풍경 또한 소유할 수 없기 때문에 더욱 탐나는 자태를 뽐내는 듯하다.


 이를 좇는 사람들은 가을 내내 바쁘다. 그 어떤 종종거림과 재잘거림이 낙엽으로 모두 떨어져 내릴 때쯤이 되어서야 시린 겨울과 고요로 들어선다. 그 차디찬 계절을 맞이하기 전에 만추를 즐기려는 사람들의 가슴 한 켠에는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들, 이미 마음속에서 여러 차례 떠나보낸 인연들, 두고 온 선물들, 돌아갈 수 없는 거리들, 무엇보다 한 때 가슴을 절절거리게 만들었던 모든 생경한 감정들을 떠올린다. 그렇다. 인생은 한 번뿐이다. 그 모든 가슴 떨림으로 주어진 날들에 감사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계절이다. 가을은 지난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물의 회귀를 시사하는 낙하 앞에서 겸허해진다. 황금 들녘의 황홀함을 자랑하는 벼마저 이에 경의를 표한다. 높은 가을 하늘이 보란 듯이 증명하듯 날카롭고 쌀쌀한 가을의 냄새는 그 어느 계절보다 시간의 흐름을 재빠르게 상기시킨다. 계절이란 그런 것이다. 지속적으로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고 있음을 상기시키는 어떤 것. 우리는 모두 돌아갈 것이라고, 땅 속으로, 흙 속으로, 내가 왔던 그 어느 곳으로. 수많은 낙엽 위에 편지를 쓰고 끝내 부치지 못하는 이유이다.


 어쩌면 가을이란 네 개의 계절 중 가장 위상이 높은 계절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종종 ‘가을 탄다’는 표현을 쓰지만, 봄이나 여름 또는 겨울을 탄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이 계절은 지난 한 해 동안의 나의 삶의 태도를 반추하게 만들고, 자주 뒤돌아보며 아쉬워하게 만든다. 인생은, 소리 없이 피어나는 봄 앞에서도 보다 끝끝내 스러져가는 가을 앞에서 가장 정직해질 수 있다. 내가 가을을 가장 사랑하는 이유다. 올해 가을은 그 어떤 지난날들보다 색색이 빛나는 단풍으로 가득 들어찰 수 있기를, 그 찬란한 아름다움을 더 오래 머금을 수 있기를 바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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