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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리 Nov 03. 2022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가끔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일이 많은 것을 바꾼다. 이를테면 옷을 사는 일이 그렇다. 옷을 산다는 건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원하는 디자인과 소재 그리고 가격을 어느 선 안에서 정해놓으면 인터넷을 통해서 언제 어디서나 쉽게 구매하고 또 교환하고 환불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옷을 사는 작은 행위에도 그 어떤 대단한 관성이 작용해 마치 커다란 궤도 안을 빙글빙글 돌 듯 어쩌면 같은 범주 안에서의 쇼핑을 지속하지 모르겠다. 삼색 고양이의 까맣고 하얗고 노란 털이 정해진 자리에만 나는 것처럼, 우리는 비슷하게 생겨 먹은 옷들만 사고 또 버리길 반복한다.


 과장을 좀 보태서 얘기하자면, 내게 '구김이 잘 가지 않는 트렌치 코치' 하나만 있었어도 나는 아마 계속 승무원으로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한창 기내 승무원 교육을 받던 시기 공항을 돌아다닐 때나 승객의 입장으로 비행에서 돌아와야 할 때 등등 종종 유니폼을 가려야만 하는 때가 있었다. 그럴 때 대부분 무난하게 트렌치코트를 챙겨 다니며 유니폼 전체를 가리곤 했는데, 유난히 당시 내가 가진 트렌치코트는 주름이 잘 갔다. 접어서 가방에 넣어 놓으면 채 한 시간이 되지 않아 말 그대로 구깃구깃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그 옷을 꺼내 입어야 하는 순간에는 쥐구멍이 있으면 숨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창피했다. 자꾸 주름진 코트로 손이 갔고, 펴는 시늉을 했으며,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사람들이 내 코트 위 주름을 흘기고 가는 기분이 들었다.


 다른 동기들이 입는 트렌치코트처럼 조금 더 빳빳하게 코팅이 된 느낌의 소재로 된 것을 구매했다면 그런 기분은 느끼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그랬다면 나는 유니폼을 가려야 하는 순간마다 오히려 자랑스럽게 트렌치코트를 꺼내 입고 당당한 걸음을 걸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사지 못했다. 그건 구김이 덜 가는 트렌치코트를 살 돈이 없어서도 아니고, 사는 방법을 몰라서는 더욱 아니었다. 그저 사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 번도 그런 옷을 사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일종의 소비적 관성이 나를 이끌어 그런 비싼 옷을 사기 보단 일에 싫증을 내고 관두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참 별것도 아닌 것 같아 보이는 것들이 실은 인생의 많은 것을 결정한다.


 그냥 사면되지 그게 무슨 관성까지 따질 일이냐 싶겠지만, 다들 경험해본 적 있을 것이다. 매장에서 가격표만 보고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마음을 접어본 적, 시착까지 해놓고 괜히 어딘가 마음에 안 든다는 트집을 잡아 구매를 포기해 본 적, 장바구니에 넣어놓고 며칠을 고민하다 결국 장바구니에서 삭제 버튼을 눌렀던 적이. 그 어떤 망설임이, 짧은 순간의 변심이, 결과적으로 그런 소비를 영영 불가능하게 만든다. 반대로 이미 샀던 것과 유사한 적당한 가격대의 물건을 사는덴 크게 망설임이 없다. 누군가는 이를 소비 습관이라고 부르겠지만 나는 오히려 관성에 가깝다는 판단을 내렸다. 어떤 절대적인 힘에 의해서 그런 소비가 좌절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꽤나 많은 관성의 영향을 받으면서 살아간다. 출퇴근 방법에는 여러 갈래가 있지만 항상 선택하던 길을 선택해서 간다. 문제가 생겼을 때 누군가는 항상 손 들고 나서서 대처하지만 누군가는 항상 한 걸음 뒤에서 상황을 관망한다. 누군가는 매해 여름마다 여름휴가를 계획하지만, 다른 누군가는 한 번도 그런 휴가를 계획해 본 적이 없다. 안 해본 것은 계속해서 하지 않는다. 내가 잘 알고 있는 편안한 지대에 머무르려는 경향 그 이상으로 우리는 삶의 어느 영역도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삶을 살아간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만큼 살았음을 자축하기 위해서 가격대가 높은 식당에 예약을 해야지, 해야지 계속 마음만 먹는 와중에, 나 스스로에게 좋은 선물을 하나 해야지, 해야지 둘러만 보고 있는 와중에 나는 과연 내 소비 관성을 벗어난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인가? 그런 의문이. 그러나 이제 그만 그 관성으로부터 멀리 달아나고 싶다. 궤도를 이탈해 멀리 달아나 달까지 날아가고 싶다. 뭐 그런 생각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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