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그랬으면 좋겠어. 인생에서 중요한 건 결국 그런 것들이더라고. 네 옆에 좋은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어. 네가 외로울 새도 없이, 혼자 눈물을 훔칠 새도 없이 옆에서 재잘재잘 대면서. 북적북적거리면서.
이른 아침, 해가 뜨기도 전의 바르셀로나 거리를 나섰다. 멀리서부터 서서히 하늘이 붉은빛으로 물들며 구름이 잔뜩 낀 맑지 않은 날을 예고하고 있었다. 이렇게 일찍 길을 나선 건 몬세라트와 시체스를 하루 만에 둘러보는 패키지 투어를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두 곳 모두 바르셀로나 근교에 위치해 있지만 개별적으로 이동해서 구경하기에는 교통이 많이 불편했으므로 패키지여행을 싫어하는 내게도 불가피한 선택지였다.
60인승은 되어 보이는 커다란 버스에 올라타 다닥다닥 붙은 의자에 낑겨 1시간가량 이동하다 보니 거대한 산맥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가이드는 이어폰을 통해 몬세라트의 중요 정보를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이 높은 산 꼭대기에 수도원을 지을 생각을 다 했을까, 가끔 보면 사람들의 집념은 좀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아름다웠다. 집념이 이런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구나. 인간사는 정말 알 수가 없어.
수도원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리니 언뜻 봐도 40명은 족히 넘어 보이는 패키지 투어 참가자들 대부분은 친구나 연인, 가족들끼리 온 모양으로 다들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멋쩍은 마음이 들었다. 사실 혼자 여행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다. 오히려 편안했지만 이렇게 단체들 사이에 있으면 얘기가 달랐다. 어쩔 수 없이 홀로 덩그러니 뭉쳐져 주변을 둘러보고 있으니 옆에 누군가 다가와 혹시 혼자 오셨냐고 물어 왔다.
여행을 하면서 좋은 동행을 만나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예전에 혼자 여행했을 때도 몇 번이나 겪었던 일들이다. 혼자 여행하다 보면 좋긴 하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외롭거나 심심해지는 순간이 오기에 동행을 구하는 경우도 있는데, 자칫 잘못하면 그 동행 때문에 여행이 최악으로 치닫기도 한다. 그래서 동행을 구할 때는 항상 조심하고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그러다 보면 결국 다시 혼자 여행하고 있고, 이런 악도 선도 아닌 순환을 계속하고 있는 날 발견하게 된다.
그는 자신을 희정이라는 이름으로 소개했고, 나는 희정 씨의 말과 행동을 빠르게 살펴 하루를 같이 보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빠른 판단을 내렸다. 이번엔 어쩐지 판단이 크게 틀리지 않았다. 희정 씨와 나는 생각보다도 더 말이 잘 통해 웃음이 끊이지 않았으며 말을 고르거나 상대방의 의중을 파악할 필요 없이 있는 그대로의 대화가 가능하기까지 했다. 우리는 투어 내내 서로의 곁에 꼭 붙어가며 그간의 여행에서 있었던 일들을 나누기도 하고, 풍경의 멋짐을 논하기도 했으며, 다른 사람들처럼 서로 열정적으로 사진을 찍어 주기도 하였다.
몬세라트에서 간단한 기념품까지 사고 버스에 다시 올라타 한 시간가량 실려 다니고 나니 해변 마을인 시체스에 도착해 있었다. 가이드가 추천해 준 식상에 가서 간단한 식사를 하고 해변가를 둘러보다 보니 커다란 강아지가 힘차게 뛰어다니며 동네를 휘젓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희정 씨와 나는 얼른 그 옆으로 달려가 사진을 찍으며 강아지의 모습을 훔치기 시작했다. 쓰다듬기엔 많이 큰 푸들이었다.
나는 조심스레 주인에게 개의 이름을 물었고, 그는 웃으며 ‘식스티’이라고 답했다. 할아버지의 환갑을 기념하며 키우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그러고 나서 주인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이 한 때 한국에서 일했었다고 덧붙였다. 그때 당시 먹었던 삼겹살, 해장국 같은 음식이 너무 맛있었다며 한국에서 살던 때가 그립다고 말했다. 나는 그의 한국어 발음에 놀라면서도 시체스가 이렇게 아름다운데 어떻게 한국이 생각날 수 있냐며 반문하고 서로에게 풀어진 웃음을 내보였다.
저녁이 됐을 무렵, 희정 씨와 나는 바르셀로나 시내로 돌아와 하루 종일 몸을 실었던 버스에서 내려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혼자서라면 가지 못했을 유명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기 위함이었다. 다행히 이른 시간이라 기다리지 않고 바로 입장한 후 우리는 스테이크, 문어 요리, 감자 요리 등과 함께 꿀대구와 레몬맥주인 클라라를 주문했다. 오래지 않아 음식이 순차적으로 나왔고 명성에 걸맞게 꿀대구는 입 안에서 사르르 녹았으므로 우리는 하나 더 주문하기까지 했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투어 내내 하지 못했었던 진지한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특히 오랜 시간 얘기를 나누었던 것은 외국에서 살아가는 일에 관한 것이었다. 희정 씨는 지금 프랑스에서 바이올린을 배우고 연주하며 살아가고 있었는데, 공부를 마치면 한국으로 돌아갈지 아니면 프랑스에 남을 것인지 선택하기 어렵다고 했다. 분명 외국에서 살면 얻을 수 있는 장점이 많다. 비단 직업적 커리어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와는 사뭇 다른 문화와 사고방식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희정 씨는 바로 그런 부분이 가장 고민이라고 했다.
“한국에서는 연주할 때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내 옆에 있는 애가 정말 나보다 더 잘하나? 나도 나쁘지 않은데. 그런데 제가 한국에 돌아간다면 더 많은 사람들과 정교하게 저를 비교하게 되겠죠. 저는 그게 싫어요. 누군가와 저를 초단위로 비교하며 사는 삶은 그만두고 싶어요.”
희정 씨는 한국이나 외국이나 악기를 연주하며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쉽지는 않은 일이지만, 외국에 머무를 경우 비교적 다른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외국에서 필연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는 소외감이나 외로움도 빼놓지 않았다.
악기와도 연주와도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나는 희정 씨가 말하는 비교나 자유의 의미를 제대로 받아들이긴 어려웠지만 외국살이의 외로움에 대해서는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나는 대화의 공백을 틈타 조심스럽게 나의 얘기를 꺼냈는데, 요지는 외국에서 살아가는 이상 결국 어쩔 수 없이 이방인으로 남게 되는 순간이 찾아오기 마련이고 나는 그걸 견디기 어려웠다는 것이었다.
누구에게나 각자가 추구하는 삶의 방향과 가치가 다를 수 있으니 진심으로 그가 스스로에게 잘 어울릴 선택을 하길 바랄 뿐이었다.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나와 서로에게 진심을 담아 남은 여행을 잘 마무리하기를, 또 서로가 어디에 있건 좋은 날들이 가득하기를 바라며 안녕을 말하며 뒤돌아섰다.
클라라가 맛있었던 탓에 연거푸 들이켜 살짝 취기가 오른 채로 바르셀로나의 거리를 걷다 보니 새삼 하루가 충만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인생을 풍요롭게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았다. 확실히 인생의 처음과 끝은 혼자일 수밖에 없겠지만 그 사이만큼은 많은 사람들로 채우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너무 깊지도 얕지도 않은 관계 속에서 서로의 감상과 생각을 나누며 내 세계를 확장하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언제나 인생 앞에 혼자서 진지하기만 할 순 없는 노릇이니까. 다른 사람들과 시시껄렁한 농담도 나누고 의미 없는 대화도 해가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여전히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게 중요한 것 같았다. 동행이라고 다 같은 동행이 아니기 때문에 나에게 잘 맞는 상대를 만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처럼 인생에서도 때마다 적절히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기를, 동시에 나쁜 사람들을 최대한 덜 만날 수 있기를 기도했다. 이제 여행의 마지막을 준비할 시간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