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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리 Aug 23. 2023

저녁을 먹고, 상처받을 준비를 했다

 내 사랑이 언제쯤 기만당할까.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항상 그런 것이었다. 내 올곧은 사랑은 종종 모난 마음에 잘못 반사된 빛처럼 삐딱하게 투영되어 날아가 상대를 상처 입힌다. 그리고 상처는 돌아온다. 상대보다 훨씬 더 아파한다. 그러니까, 내 마음이 항상 잘 못하고 또 잘못한다. 누구를 탓할 수 있는 것이라 아니라 고요히 앉아 상처를 받아들일 자세를 취하기로 했다. 가만히 책상 앞에 앉아 양팔을 포개어 올려놓고 그 위에 머리를 얹는다. 울지는 않는다. 눈물이 나올 리 없으니까. 그저, 담담히. 상처의 행보를 지켜본다.


 내가 ‘아’라고 말한 순간, 그 말은 상대에게 다가가 ‘어’로 발음된다. 내가 ‘사랑’이라고 외치면 종종 ‘증오’로 변해 날아가기도 한다. 대체 왜 그럴까. 마음을 곧이 곧 대로 전달하는 일이 왜 이렇게 쉽지가 않을까. 이런 것들은 아무리 연습을 해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순간 모든 것이 백지화된다. 우리는 평생 타인을 이해하면서 살아갈 수 없구나. 인간에게 내려진 가장 커다란 천형이 아닐까. 조심스레 발음해 봤다. 이해. 사랑. 그 근원지의 떨림. 가능성의 여부. 조악한 세상의 실체.


 저린 팔을 주무르며 거실에 나가 소파에 앉았다. TV를 켜다 문득 떠올렸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TV를 보면 사랑이야기보다 모험이야기를 더 좋아했다. 작은 인간 하나가 역경을 겪고, 헤쳐나가면서 성장하는 이야기. 끝내 성숙하고 세상을 이해하는 이야기. 나는 그런 순간에 감동을 받는 애였다. 누가 말해준 건지 모르겠지만, 그 시절에도 드라마에 나오는 사랑 이야기는 전부 환상이라고만 생각했다. 더 이상 꿈을 꿀 수 없는 어른들의 자위행위. 인생에서 가장 좋은 건 꿈을 이루는 것이고, 성공하는 것이고 사랑은, 사랑은 그저 부수적인 것에 불과했다.


 솔직히 말해봐. 너 정말 사랑이라는 게 있다고 생각해? 친구들한테 그런 걸 물으면서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삶이라는 게 참 웃기기도 해서, 내 꿈도 그 누구의 것과 다르지 않게 금세 시시해졌다. 그리고 그 무렵부터 별반 다르지 않은 어른이 되어 사랑의 부재를 느끼기 시작했다. 다른 꿈, 다른 목표, 다른 성취로 채워 나가려 노력해도 가슴 한 구석에 뻥 뚫린 구멍은 채워질 줄을 모르고. 나도 별 수 없는 어른이 되었구나, 한숨을 쉬면서 계속 초조해했다. 어디든 뿌리를 내리지 못해 안달이 난 나무처럼.


 그런데 막상 사랑을 시작하려니 쉽지 않았다. 사람도 관계도 뜻대로 되지 않아 자주 삐그덕거렸다. 반복되는 과정에서 남은 것은 공허함. 사랑을 해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절망감. 나라는 사람이 문제라는 죄책감. 모두가 실은 나를 싫어할 거라는 진부한 감정까지도. 그래도, 계속 이렇게 실체 없는 두려움 속에 빠져 살고 싶지는 않았다.


 이번만큼은 싫증을 내는 대신에 정성을 다 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다시 책상으로 돌아가 내 말은 ‘어’가 아니라 ‘아’였다고 조심스레 편지를 쓰기로. 하고 싶은 말은 너무 많은데. 내 마음을 표현하기에 말은 너무 어렵고, 어렵고. 좀처럼 쉬워지지 않고. 하고 싶은 말들을 입 안에 고이 모아 놓았다가, 혓바닥 위에서 굴리고 잇몸으로 뭉개보고 그러다가 삼키지도 못하고 뱉지도 못하고 잔뜩 울상이 되었다가.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몰라 자꾸만 빙빙 돌려 글을 쓰다 멈춰 멍하니 떠올린다. 그 순간. 그런 순간들.


 꼭 잡아야지. 잡고 놓지 말아야지. 오해를 멀리 풀어주고 너를 껴안아야지. 그리고도 다시 상처를 받는 날엔 겸허히 고개를 다시 팔 위에 얹어 놓아야지. 내게는 지어야 할 저녁밥이 아주 많이 남아 있으니 괜찮을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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