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재리 Sep 13. 2023

목적 없는 삶을 살기란 좀처럼 쉽지 않아서

 무언가에 목마른 사슴처럼 새로운 목적을 향해 기웃거리는 것이 나의 일상이었다. 틈만 나면 새로운 우물을 팠다. 업무 관련 자격증을 따기도 하고 새로운 언어에 도전해보기도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는 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서. 나의 사는 것이 그 누구의 것과도 다르지 않은 것 같아서. 좀 더 나은 내가 되고 싶다는 열망이 가득해서.

 

 그런 힘도 없는 날에는 우물이 아닌 동굴을 파고 들어가기 일쑤였다.


 “성취감이 갖고 싶은 거면 운동을 좀 해봐.”

 거꾸리 하듯 침대에서 늘어져 있는 나를 한심하게 보던 친구는 말했다. 운동이 성취도가 눈에 팍팍! 보여서 좋대. 팍팍!이라는 말에 손바닥 옆 날을 세워 박자에 맞춰 흔들며 강조하는 것도 잊지 않으면서. 운동? 그거 나약한 사람들이나 하는 거 아니야?

 “운동을 안 하니까 나약해지는 거지, 몸도 마음도.”

 그는 나의 우스갯소리에 반응도 해주고 싶지 않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오늘 좀 재수 없다.”


 나는 대화할 의지를 읽고 그만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래도 운동은 정말 싫은데. 안 그래도 우울증에 운동이 좋다는 얘기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시도를 안 해본 것도 아니다. 남들 다 하는 헬스, 스피닝, 복싱, 요가, 발레 등등 접근성이 높으면서 진입장벽이 낮은 운동은 다 해봤다. 3개월 이상을 못해서 그렇지.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하라고? 아무리 인간이어도 좀 너무한 처사가 아닌가 싶었다.


 그러다 코로나를 만났고 몇 주, 아니 몇 달 가까이 집 반경 5km를 벗어나지 않는 생활을 하다 보니 문득 꿈속에서 달리기 시작했다. 아주 너른 운동장 트랙을 홀로 끝없이 질주하는 꿈을. 아무도 나를 막아서지 않았고, 내 심장도 다리도 너끈히 버텨주었다. 꿈속에서도 바람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하늘을 보고 뛰면 하나도 안 힘들다?”

 고등학생 시절 함께 하교하던 길이 지루했던 한 친구는 냅다 달리면서 말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영문도 모르고 따라 뛰는 나를 향해 거의 소리를 지르다시피. 그랬던 그 말이 꿈속에서 다시 재생되었다. 구름 좀 봐 봐, 진짜 멋있지 않냐 – 그런 메아리 같은 울림과 함께. 바로 그날, 꿈에서 깨어나 이른 새벽 공기를 뚫고 근처 체육 센터 운동장으로 향했다. 한 번도 제대로 뛰어본 적 없지만 무작정 딱 30분만 너무 힘들면 걷다 뛰다를 반복해서라도 채워보자고 생각했다. 새벽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아 그 사이를 휘젓고 다니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시작한 러닝은 내 인생의 절반 가까이를 바꾸어 놓았다. 다리에 근육이 제대로 박힌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은 거의 천지차이였다. 내딛는 걸음걸음이 훨씬 더 안정적이라 이 세상 위에서 제대로 균형을 잡고 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누가 와서 갑자기 태클을 걸어도 흠, 약해, 작게 중얼거리며 내 갈 길을 마저 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스트레스 해소에도 큰 효과가 있었다. 나를 둘러싼 모두가 갑자기 가시로 뒤덮인 옷을 입고 내 주변을 오가는 것 같은 착각이 들 때, 커다란 곰인형을 품 속 가득 끌어안아도 해결되지 않을 만큼 예민해졌을 때, 그럴 때 더 이상 이불 속에 들어가서 울지 않았다. 대신 러닝화를 신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언제나 나를 살게 하는 음악 소리를 들으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질주할 땐 내가 세상을 이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외에도, 활력이 생긴 것이나 이왕이면 몸에 좋을 것을 먹는 등 러닝은 내 일상의 전반을 바꾸어 놓았다.


 하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속적인 성취감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저번 보다 조금 더 빠른 기록, 안정적인 페이스, 근육의 사용 이런 것들을 체크하며 나날이 향상되는 자신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 이런 것들은 더 이상 스스로에게 과연 잘 살고 있는지를 묻지 않도록 해줬다. 동태 같은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왜 살아야 하는지 묻지 않게 되었다. 대신 어떻게 하면 더 잘 뛸 수 있을까, 언제 뛰면 좋을까, 그런 계획을 세우게 만들었다.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이렇게 딴생각을 최대한 줄이고 가는 대로만 간다면 분명 후회하지 않는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을. 목적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나아가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우리 삶은 의외로 쉽게 간단해질 수 있다는 것도.

매거진의 이전글 결국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이 나를 살게 함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