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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리 Nov 23. 2023

한 발자국만 벗어나면 여긴

   7월부터 내리기 시작한 세찬 장맛비를 창문 너머로 바라보며 생각했다. 와, 이런 날 출근하지 않는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구나. 그다음 날엔 오전 열 시가 다 돼서 기상한 후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적응이 빠른 편인가?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오후 한 시에 유튜브로 생중계되는 오케스트라 실황 중계를 보며 생각했다. 이건 축복이다. 


   좀 더 맛있는 감상을 위해 편의점으로 향했다. 오전의 햇살이 눈부셨다. 원래 이랬었나, 햇볕이 직사광선으로 나를 내려 쬐는데 괜히 벌거벗은 기분이 들었다. 

   잠깐만, 나 지금 어디 가는 거지? 이 시간에 왜 돈 벌지 않고 쓰러 가고 있지? 와, 내 인생 괜찮은가? 


   편의점에서 마음에 들어 집은 빵은 꽤 비쌌다. 사천 원. 그게 마치 사만 원처럼 비싸게 느껴졌다. 돈을 벌지 않는다는 건 꽤나 많은 걸 의미했다. 나의 사고, 행동 방식, 그 모든 것에 대한 제약.


 


   오랫동안 고민하다가 결국 인터넷 강의를 결제했다. 교육학 32만 원, 전공 58만 원 합이 딱 90만 원이었다. 누군가 조롱을 건네듯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90만 원. 강의 커리큘럼은 대체로 기본 개념(1~2월) – 심화 과정(3~6월) – 문제 풀이(7~8월) – 모의고사(9~11월) 식으로 나눠졌는데 일단 기본 개념 강의만 구매했다. 그 마저도 실은 기본 수험 도서를 독학으로 읽다, 아무리 읽어도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아 구매를 결정했다.


   가난에는 이자가 붙는다는 말, 그게 정확히 무슨 뜻인지 모르면서도 실감했다. 대학교 4학년 때, 조금의 여유가 더 있었더라면 그래서 독학이 아니라 강의를 구매할 수만 있었더라면 아마 그렇게 쉽게 포기하지는 않았을 텐데. 단돈 90만 원, 그게 없었던 게 아니라 그걸 쓸 마음의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인생을 돌아 돌아 다시 이 결제 창 앞에 서 있으니 그 긴 세월이 내가 바친 이자처럼 느껴졌다. 나는 또 이 결제를 마치기 위해 얼마나 수없이 마우스를 들었나 놨다 했는지.


   다행히 강의는 기대 이상으로 많은 도움이 되었다. 나는 소위 말하는 ‘노베이스’였다. 사범대 출신도 아니고, 전공마저 ‘역사’가 아닌 ‘국사’였다. 고등학교 때까지 동양사 서양사에 대해 제대로 배워본 적도 없다. 게다가 졸업한 지 이미 4년도 넘게 흘렀으니, 전공 지식마저 까먹은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세상에 하다 하다 중국 왕조의 순서조차 몰랐다. 일본사는, 그냥 백지였다. 백지. 막부가 뭔지도 모르는 백치. 그게 바로 나.


   많은 시험이 그렇겠지만 임용 시험 또한 범위랄 게 없다. 다만 많이 사람들이 읽는 필독서가 있고 출제가 자주 된다는 수험서들이 있을 뿐이다. 그랬기 때문에 아마 혼자서 관련 도서들을 읽어 내렸다면 책을 덮는 즉시 잊어버렸을 게 뻔하다. 강의는 기본적인 구조화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었고, 나 말고 누군가 함께 있다는 사실이 간접적으로 심적 안정감을 주었다. 


   강의를 듣고 나서부터는 엉덩이 붙이고 오래 앉아 있는 게 어렵지 않았다. 자격증 준비를 할 때만 하더라도 이젠 공부는 무리라고 생각했는데 하루 8시간은 너끈히 해냈다. 점차 시간을 늘려가다 보니 하루 10시간은 기본적으로 하게 됐다. 일단 역사 자체가 싫지 않았던 게 가장 큰 이유겠지만, 나만의 전문 분야를 가질 수 있게 됐다는 사실에 상기된 것도 있었다. 욕심이 났다. 하면 할수록 잘할 수 있는 일. 나만의 분야. 갖고 싶었다. 자주 갖고 싶어서 강의를 듣다가도 무의식 중에 그런 말들을 강의를 교재 끝부분 작은 틈에 적기도 했다.




   아무와도 대화하지 않는 날도 익숙해졌다. 8평 남짓한 작은 공간에서 자고, 먹고, 공부하고, 씻는 것만을 반복하는 날들. 그런 내가 너무 지겨운 날에는 밖을 나섰다. 집 앞 카페로 향했다. 층고가 높고 전면이 통창으로 된 카페는 집 안에서 느끼는 답답함을 다소 해소시켜 줬다. 그런 식으로 세상이 실은 굉장히 넓다는 걸 스스로에게 지속적으로 상기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금방 책 속에 빠져, 글자들 틈에 빠져 질식할 것 같았으니까. 현실 감각이 필요했다.


   어느 날엔 강의를 듣다 말고, 노트북을 덮고는 친한 친구에게 장문의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보통은 이런 식.

   ‘아주 오랫동안 열심히 노를 젓고 항해를 한 기분이야. 지난 몇 년 간의 시간 동안. 너도 알지, 나 그게 뭐든 최선을 다하는 편인 거. 근데 문득 내가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겠는 거야. 분명히 열심히 노를 젓고 있는데, 정말 사력을 다해 하고 있는데 이 방향이 틀린 거면 어떡하지? 그래서 배에서 내렸어. 잠깐만 떠다니려고. 부유해 보려고. 이런 나를 한심하다고 생각하지는 말아 주라.’


  그건 종종 나에게 하는 말이었으므로 기껏 메시지를 써놓고 보내지 않는 날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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