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재리 Nov 16. 2023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

   계산기를 두드려봤다. 수포자 출신도 먹고살려면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게 인생이었다. 실전에 들어가기에 앞서 임용 시험을 준비할 기간과 예산을 고려해 계획을 작성했다. 여러 가지 계획안이 나왔지만 최종적으로는 두 가지 안으로 정리가 됐다.


   1)    1년 반 만에 합격할 경우

   (1)   시작 금액 : 52,000,000원

   (2)   준비 기간 : 1차 16개월 + 2차 3개월 = 총 19개월

   (3)   예산 : 600,000원(한 달 생활비) X 19개월 + 5,000,000원(강의 및 교재 등) = 16,400,000원

   (4)   약 35,000,000원에서 다시 시작


   2)    2년 반 만에 합격할 경우

   (1)   시작 금액 : 52,000,000원

   (2)   준비 기간 : 총 31개월

   (3)   예산 : 600,000원 X 31개월 +6,000,000원 = 24,6000,000원

   (4)   약 27,000,000원에서 다시 시작


   나이 서른이 다 돼서 모아 놓은 돈을 다 까먹고 다시 시작이라니. 열심히 세워놓고 봐도 기가 막히는 계획이었다. 다만, 6월부터 공부해서 11월에 시험을 치고 5개월 만에 합격하는 계획은 아예 세우지 않았다. 세상에는 기대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 있고 내게 있어 5개월 합격은 그런 일에 해당했다.


    더군다나 역사 과목이다. 다른 학과도 마찬가지겠지만 역사는 유난히 역사 ‘덕후’들이 많은 탓에 경쟁률이 치열하다. 그들의 지식의 깊이와 열정에 비견한다면 사실 나의 그것은 초라하기 짝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사학과 나와서 취업할 수 있는 곳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도 큰 문제지만.


   어쨌거나 역사 과목은 국영수 과목 다음으로 지역과 경우에 따라서는 그보다도 경쟁률이 치열한 과목에 해당했다.

 

   ‘기본 3년은 잡고 간다’

   그런 말을 많이 들었던 것도 영향을 미쳤다. 역사 중등 임용 합격 후기를 읽어보면 초수에 합격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다들 재수 그보다는 삼수에 붙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이를 적절히 고려해서 짠 계획이라고 할 수 있겠다. 5개월 만에 합격? 지나가던 개도 킬킬거리고 웃겠다.




   더 이상 머리를 쥐어짤 것도 없었다. 애초에 거창한 계획이 필요하지 않은 일이었다. 설령 3년 안에 붙지 못한다고 해도 그다음 연도까지는 어떻게든 될 일이었다. 이제 계획은 끝났다. 실전에 돌입해야 할 시간이었다. 


   우선 첫 번째로는 이것.


   ‘팀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언제 시간 괜찮으실까요?’

   항상 ‘을’을 자처해야 하는 팀장님 앞에 단 한번 ‘갑’이 될 수 있는 순간이 있다. 너도 알고, 나도 알았다. 내가 지금 하려는 말, 팀장님이 생각하는 말. 바로 그 말.


   “저 이번 달까지만 일 하고 그만두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재빠르게 팀장님의 얼굴을 살폈다. 아마 팀장님은 나를 설득하려고 할 것이다. 우리 회사 나가서 더 잘 된 사람 봤어? 옆 팀에 차 대리 봤지? 본인 사업한다고 나가더니 결국 다시 돌아왔잖아. 뭐 그런 시시한 레퍼토리, 안 봐도 비디오다.


   “아니 갑자기 왜?”

   그러나 나는 결연하까지 하다. 팀장님이 뭐라 하든 귀 꾹 닫고 내 길을 갈 작정이 되어 있다.

   “임용 시험을 좀 준비해 보려고요.”

   “선생님? 뭐, 어디? 초등학교?”

   팀장은 신선하다는 반응이었다.

   “아니요, 중등이요.”

   “무슨 과목?”

   “역사요.”

   흡사 스피드 퀴즈 같은 대화가 빠르게 오갔다.

   “오오- 그거 좋지. “


   그리고 팀장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팔짱을 꼈다. 무슨 말을 더 하려나 싶어서 기다렸는데 그게 끝이었다. 네에, 말을 끌며 팀장의 다음 말을 재촉했지만 팀장은 잘해보라며 응원하겠다는 말 뿐이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좋은 생각이라도 난 듯 얼굴을 번뜩이며 부산에 용한 점집이 있다며 가보는 걸 추천한다고 말했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 일단 점을 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는다며. MBA까지 밟았다는 사람이 점을 권하는 장면이 신선했다. 어쨌거나 팀장은 입사 때부터 좀 특이하기는 했으니까.




   언제부터인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을 할 때 떨리지 않게 되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는 게 나의 판단이다. 잘 다니던 회사 때려치우고 시험공부라니, 벌써 우리 엄마 아빠 얼굴에 주름이 하나씩 추가되는 게 보일 정도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기도 했다. 전문성을 갖추기 위해서, 더 오랫동안 일하기 위해서, 이게 하나의 게임이라면 난 나에게 베팅해 보기로 했다.


   후회는 내 몫이 아니다. 그건 자신의 선택에 최선을 다 하지 않는 사람이 하는 일이므로.


이전 04화 역사(임용)의 역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