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4등>과 폭력이 난무하는 스포츠 교육 현장
수영을 좋아하고 재능이 있어 보이지만 대회만 나가면 늘 4등밖에 못하는 초등학생 준호가 있다. 항상 메달권에 진입하지 못하는 준호를 보고 엄마는 끈질긴 수소문 끝에 한 코치를 아이에게 붙인다. 엄마가 선택한 코치는 16년 전 아시아 신기록까지 달성한 국가대표 선수이지만 국가대표 감독의 폭력으로 아시안게임 진출이 좌절되었던 이력이 있었다.
현재에도 코치는 수영계에서 유명하다. 체벌을 통해 성적 향상을 해주는 걸로 암암리에 알려있었다. 엄마는 준호의 등과 엉덩이에 새겨진 멍을 애써 모른척하면서 드디어 수영대회가 찾아왔다.
엄마의 표현을 빌리자면 준호는 '거의 1등'이었다. 1등과 0.02초 차이로 생에 첫 은메달을 목에 건다. 그렇지만 준호는 지속적인 폭력으로 지쳐있었고, 결국 수영을 그만두겠다고 선언해버린다. 만류하는 엄마에게 준호는 이렇게 말했다.
"엄마는 내가 맞아서라도 1등만 하면 좋겠어?"
영화 <4등>은 엘리트 스포츠 교육 현장에서 만연하게 존재하는 폭력을 주제로 삼고 있다. '요즘도 그럴까?'라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만 17세에 국제빙상연맹(ISU) 세계선수권 개인 종합 우승 포함 3관왕에 오른 심석희(21, 한국체대)는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한 코치에게 폭행을 당한다.
빙상연맹 설명에 의하면, 심석희는 '컨디션이 올라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손찌검을 당했고, 그 충격으로 선수촌을 이탈했다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선수촌 방문을 앞두고 빙상연맹을 통하여 심석희 선수의 참석을 요청했지만, 빙상연맹은 "독감으로 아파서 나오지 못한다"라고 둘러댔다. 대통령 앞에서도 폭행을 조직적으로 은폐한 것이다.
(이후 조재범 코치의 성폭행이 밝혀지면서, 2020년 1월 상습 성폭행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 10년 6개월을 선고받음)
엘리트 스포츠 폭행은 코치만이 주인공이 아니다. 선후배 간에도 이루어진다. 베이징 올림픽 역도 금메달 리스트였던 사재혁(한체대 졸, 은퇴)은 2016년 리우 올림픽을 앞두고 후배를 폭행했다. 사재혁은 자신에게 맞은 일을 소문내고 다닌다는 이유로 후배인 황우만을 폭행해 전치 6주의 상해를 입혔다. 왼쪽 눈 밑 뼈가 부서졌고, 황우만 측은 이를 언론에 알렸다. 사재혁은 병원에 찾아가 후배에게 사과했음에도 10년간 자격정지를 받으며 리우 올림픽을 앞두고 불명예 은퇴했다.
비인기 종목만의 일이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관중을 동원하는 야구에서도 폭행 논란이 일었다. 프로야구 구단 넥센 히어로즈는 2018년 1차 지명 신인 투수 안우진을 2018 시즌 50경기 출장정지 처분을 내렸다. 휘문고 재학 시절 후배 폭행 사건에 연루된 것이 뒤늦게 알려졌기 때문이다.
안우진은 투수로서 우수한 신체조건과 시속 150㎞가 넘는 강속구를 앞세워 고교 시절부터 여러 프로구단에서 주목받던 특급 유망주였다.
자초지종은 이렇다. 학창 시절 안우진은 후배에게 메이저에 갔을 때 자신이 성공할 수 있을지 물었다. 후배가 '형은 실력이 되지 않는다'라고 답해 이에 야구공으로 후배의 머리를 쳤다고 주장했다. 반면 피해자 측은 '국내에서 기량을 닦아 나가도 늦지 않는다'라고 답하자 야구방망이를 휘둘렀다는 주장이다. 이후 드러난 사실은 혼자 한 것이 아니며 4명이 야구공과 방망이로 1, 2학년 후배 4~5명을 구타했다는 것이다.
당초 안우진이 했던 해명이 논란을 더 키웠다. 처음에 했던 사과는 정말 구닥다리였다. KBO(한국야구위원회)에서 개최한 신인 선수 오리엔테이션에서 안우진은 "지나간 일이기 때문에 잊고 감수하려고 한다", "제가 앞으로 야구를 잘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실력으로 자신의 잘못을 갚겠다는 논리였다. 안우진의 성공이 맞은 후배들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안우진에게 맞은 후배들은 반대로 안우진의 실패를 바랄 텐데 말이다. 이후 논란이 거세지자 다시 사과한다.
"저 때문에 피해를 당하신 모든 분께 진심으로 사죄드린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제가 행한 일에 매우 후회하지만,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 앞으로도 늘 죄송한 마음을 갖고 참회하며 살겠다."
엘리트 스포츠는 왜 자꾸 사람을 때릴까? 왜 안우진은 실력으로 속죄하겠다고 했을까?
우리나라 엘리트 스포츠는 '국위선양'에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1988년부터 서울 올림픽을 시작으로 올림픽에서 종합 순위 10위 안에 들었다. 인구가 1억 명도 채 되지 않은 나라가 10위권에 드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국가는 철저히 '선택과 집중'을 했다. 1970년대 군부독재 시절부터 전문체육인 양성소인 체육중학교, 체육고등학교, 체육대학교를 통해 나라의 이름을 빛낼 엘리트 선수를 길러냈다. 소수 엘리트들은 혹독한 훈련을 거쳐 국제무대에서 메달을 따는 것이 지상 최대의 목표였다.
소수 엘리트들에게는 특혜가 제공되었다. 특별전형으로 대학교를 갈 수 있었고, 숙식이 제공되었고, 가끔은 수업에 참석하지 않아도 졸업할 수 있었다. 이번 동계올림픽 매스스타트에서 정재원 선수가 이승훈 선수가 금메달을 딸 수 있도록 유리한 환경을 조성해주기 위해 페이스메이커를 하는 건 어쩌면 그들 입장에선 당연한 일이었다.
한국 스포츠는 대외적으로 '국위선양'이 목적이었으므로 국내에서는 '승리지상주의'가 만연할 수 있었다. 다른 이보다 높은 순위를 기록하는 것은 소수만이 받을 수 있는 혜택에 가까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경기에 나가서 이겨야 할 이유는 분명했다. 선수만이 아니라 지도자에게도 고용을 보장받기 위해서 맡고 있는 선수들의 금메달과 상위 성적이 필요했다.
따라서, 코치와 선수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가혹하게 때려야만 했다. 운동을 즐긴다거나 정해진 규칙 안에서 최선을 다하고, 반칙을 하면 벌칙을 받으며, 패배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가치 따위는 사치로 받아들여진다. 폭력을 써서라도 잘하게 만드는 문화에서 공동체를 위한 선이나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 자라기에 너무 척박하다.
다시 영화<4등>으로 돌아가 보자. 폭력은 폭력을 낳았다. 과거 준호의 코치는 국가대표 감독에게 맞았다. 준호의 코치는 준호를 때렸다. 준호는 자신의 물건을 썼다는 이유로 자신이 받은 체벌을 똑같이 동생에게 재현한다. 안우진, 사재혁도 자신이 맞았던 만큼 후배들에게 돌려줬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소수의 엘리트 선수들이 금메달을 따면 몹시 불편하다. 그 선수가 금메달을 따기 위해 얼마나 많은 폭력이 가해졌고, 소수의 혜택을 받지 못하며 버려진 선수들이 얼마나 존재했는지 가늠조차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나는 올림픽에 꼴찌를 하더라도 폭력적인 교육 환경이 사라지고, 다수의 생활체육인들이 즐기며 살아가는 나라에서 살고 싶다.
덧붙여, 이번 평창올림픽 컬링 팀의 은메달은 반갑다. 방과 후 수업하다가 재밌어서 팀을 만들고, 올림픽에 나갔고, 은메달을 땄으니깐! 여기엔 애국주의, 소수 엘리트주의란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