뚱보 고슴도치

bgm : 오예린 - 고슴도치

by 민서


사회생활도 해보고, 이리저리 굴려져도 보면 사람이 둥글둥글해지는 법을 배울 줄 알았는데. 이게 웬걸. 몸뚱이가 둥글둥글해지는 방법 말고는 배운 게 없다. 오히려 더 예민해졌다. 숨겨왔던 나의~ 예민함을 깨닫기만 해 버렸다. 하나씩 뾰족한 예민함이 자라나더니 그냥 살찐 뚱보 고슴도치가 되어버렸다. 젠장.


예민함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대부분 뭔가 날카롭고 까다로운 이미지를 떠올리곤 한다. 그러나 사실 예민함은 연약함과도 같다. 그 부분이 연약해서 극도로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내가 고슴도치로서 한마디 해보자면, 사실 고슴도치들은 다 겁쟁이다. 적에게 대항하는 방법이 가지고 있는 가시를 세우는 것 말고는 없기 때문이다. 헬스를 열심히 해서 말벅지를 기른다던가, 권투를 배워 주먹의 매운맛을 키운다던가. 힘을 키울 생각은 안 하고, 등만 잽싸게 돌려버린다. 그저 등 돌리는 거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이다. 뾰족뾰족 무서워 보이지만, 어떻게 보면 내세울 게 가시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다. 작은 고슴도치를 생각해 봐라. 거친 뒷면에 비해서는 하얗고 뽀얀 속살에 귀여운 눈코입을 가지지 않았는가.


짧은 다리와 작은 체구의 고슴도치. 잠깐. 이 녀석. 설명하면 설명할수록 나랑 너무 닮아서 열받는다. 아무튼 자자 다들 잘 들어봐라. 우리 고슴도치들은 가시를 세우고 싶어서 세우는 게 아니다. 그러니 날카롭다고 무서워하지 마라. 당신들이 더 무섭다. 가시 없이도 다가오는, 무기 없이도 상처를 주는 당신들. 상처를 피하는 방법밖에 모르는 내게 둥글게 살라는 말은 너무 무책임한 말처럼 들린다. 이 가시를 둥글게 만들거나 혹여나 없애버리기라도 한다면? 적이 다가올 때, 어떻게 대처한단 말인가. 그러니, 둥글게 둥글게 살라는 말은 애초에 고슴도치인 우리에게는 적합한 조언이 아니다.

사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가시를 둥글게 만들거나 없애는 게 아니라 등을 돌려 귀여운 얼굴로 조금이라도 협상하는 방법을 배우는 게 아닐까. 가끔 그런 상상을 한다. 내가 가진 가시를 하나 뽑아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요구하는 이들을 향해 이리 콕, 저리 콕 찌르는 상상. 상상만 한다. 상상만. 나와 맞지 않는다고 다 피투성이로 만들어버릴 수는 없으니 말이다^^.


나는 고슴도치 중에서도 사회생활을 좀 잘하는, 사회화된 고슴도치였다. 상대방이 원하는 걸 빠르게 눈치채고, 원하는 말만 예쁘게 해 줬다. 그랬더니, 사회생활 잘한다는 말을 들었다. 칭찬이라고 한 말이었겠지만, 그 말이 칭찬처럼 들리지 않았다. 사회생활. 사람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집단적으로 모여서 질서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공동생활일 뿐인데. 사회생활 잘한다는 뜻이 언제부터 상대방에게 호호 웃으며 잘 맞춰주는 능력이 되었는지 도통 모르겠다.


그래도 뭐 못한다는 소리를 듣는 것도 아니고, 잘한다고들 말하니. 차라리 잘하는 게 하나라도 더 있는 게 다행이다 싶다. 요즘에는 사회생활 실력 양성을 위해, 내 예민함을 감싸 안고 귀여운 얼굴을 내보이는 안면근육 운동을 열심히 하는 중이다. ‘허걱!’, ‘아이고!’와 같은 추임새를 추가하면서 말이다. 속으로 ‘네가 뭔데 X랄이야’를 외치고, 동시에 ‘아이고! 죄송합니다’를 뱉으며 방긋 웃는다. 히히.


(PS. 원래 이 글의 제목은 뚱땡이 고슴도치였는데, 글쎄 ‘뚱땡이’가 옳지 않은 표현이란다. 그래서 뚱보로 바꿨다. 근데, 뚱보라고 하니까 괜스레 더 기분이 나쁘다. 우 씨.)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