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 빨간 스티커가 집안에 덕지덕지 붙어있나. 어린 나는 소파에 앉아 가만히 그걸 구경하고 있었던 것 같다. 만지면 안 된다는 말과 함께. 스쳐 지나가는 장면밖에 남지 않은 그 어린 시절에. 우리 집은 부도가 났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가난하게 살아가고, 그 가난함을 물려받는 삶이란. 아빠에게 가난함은 지우고 싶었던 이름이었다고 한다.
그 시절, 우리 집은 가난했다고 하는데. 사실 난 가난했던 기억이 잘 없다. 기억 못 할 정도로 어리기도 했지만, 살면서 가난함을 느껴본 적이. 음. 딱히 없다. 정말이다. 내 삶은 가난하지 않았다. 해외로든 국내로든 여름에 한번, 겨울에 한번. 우리 가족은 여행을 갔었다. 나는 우리 아빠가 부자인 줄 알았다. 먹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 다 해줬으니까. 아니 돈도 없는데, 가난한데 여행이라니. 이게 어찌 된 일인가 하고 봤더니. 아빠는 엄청나게 많은 빚이 있었는데도, 돈을 빌려 여행을 떠났다고 한다. 뜨악. 아니 도대체 어디서 그런 막대한 용기를…. 내 추억 속에 있는 여행은 다 빚을 지고 떠난 여행이었다. 엄마는 애써 묻지도 않고, 말리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러니까 둘이 사는구나…?) 알 수 없는 아빠의 용기(?) 덕분에, 내 삶에는 추억이 많다. 아빠는 몸은 가난했지만, 마음은 부유한 사람이었나 보다.
그래서 나는 아빠에게 가난함을 물려받지 않았다. 그 대신… 이놈의 용기! 용기가 대물림되고 말았다. 띠로리. 일단 뛰어들고, 저지르고 본다. 미래도 중요하지만 ‘현재’도 중요하다. 우리 사회는 항상 ‘지금 열심히 해야, 나중에 행복하다!’라는 타이틀을 강조해 왔다. 그러나, 현실은? 받은 월급을 꼬박 모아도 집 하나 마련하는 건 꿈같은 이야기이다. 먹고 싶은 것 참고, 사고 싶은 것 참고. 참고 참아서 전세로 집 사면 뭐 하나. 전세 사기로 청년 등쳐먹는 놈들이 허다한데. 그런데도 돈을 모으라고? 떼잉 쯧! 나중에 행복하기는 무슨, 다 착각이었다!
모으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순간에 찾아오는 행복을 일부러 멀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돈을 무서워하다 보면, 돈에 쫓기는 삶을 살게 된다. 내 짧은 청춘 다 지나고, 어디 움직이기도 성치 않은 몸이 되어서야 여행 다니는 삶이 과연 좋다고만 할 수 있을까? 과시욕에 눈이 멀어, 명품을 사고 비싼 레스토랑에 가자는 말이 아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에 투자하자는 것이다. 추억은 비싼 돈을 들여도 살 수 없으니 말이다. 몸이 가난하다고, 마음까지 가난하면 너무 슬픈 청춘이지 않겠는가. 나는 오히려 (과시욕에 미친 일부를 제외한) 2030 세대들이 행복을 찾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돈 많은 베짱이나, 벼룩의 간 빼먹는 사기꾼들 해결해 줄 것도 아니면서. 자꾸 일개미처럼 일하고, 돈 모으고, 참으라고 하다니! 이거 몽땅 일 시키려는 개수작이 분명하다. 휴. 나는 용기가 대물림되어서 참 다행이다. 말도 안 되는 주입식 교육에 휘청이지 않으니 말이다! 아빠처럼 열심히 일하고, 행복을 위해 추억도 쫓는 사람이 될 거다. 열심히 돈 모으고, 그걸로 여행도 가고 돈도 갚는! 열심히 일하는 베짱이가 되어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