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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아무나 Jan 04. 2016

09. 진한

                                                                                                                                                                                                                                

지지난 겨울, 혹은 여름이었을 것이다.

아무렇게나 쥔 흙 한 줌을 쥐어다 흩뿌린 곳에서 조그맣게 싹이 났었다.

내 주먹 어디에 새 생명이 있었을까 궁금해 손바닥을 쥐었다 펴보며 살펴보던 것도 잠시,

짝짝이 떡잎에 제멋대로인 줄기에 저게 잘 자랄 수 있을까 고개를 갸웃거렸다.


희한하게도 제멋대로인 그 모양새로 자꾸만 자랐다.

시들하게, 노랗게, 혹은 썩어들어가 잘라내야만 하면서도 자꾸만 자랐다.

물도 주지 않고 분명 햇빛도 많이 쐬지 못했는데

보는 이의 눈썹을 모으기도 하고 높이기도 하면서 그렇게 자꾸만 자랐었다.

그렇게 몇 번의 계절이 흘렀었다.


솔직히 잊혀졌었다. 아니, 시든 꼴을 보기 싫어 일부러 외면했을 것이다. 혹은 무심결에 밟고 지나갔을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다시 돌아와보니 어느새 자라고 자라 떨어진 시든 잎들 사이로 가늘은 연보랏빛 꽃봉오리가 숨어있다.


자신이 없었다.

내가 언제 어디서 저런 것을 가져왔는지, 언제 저렇게 자랐는지 알 길도 없고

저 꽃을 예쁘게 피워내어 감상할 것이라는 마음의 여유 또한 없었다.

그렇게 아무런 결정도 못한 채 고민에 고민을 더하며 만지작거린 여린 꽃봉오리는 손가락의 힘에 짓눌리고 손톱에 뭉개져

결국 푸른 하늘을 보지 못했다.

그때도 더 이상의 생각은 하지 못했다. 피지 못한 꽃잎의 촉감이 차가웠다.


이제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지나가는 아이들의 웃음에 따라 웃는다. 신발끈을 묶는데 돌 사이에 겁없이 자란 초록 풀이 예쁘다.

나와 함께할 소중한 무언가가 그립다. 문득, 그날의 피지 못한 꽃이 생각났다. 왜 그랬을까, 왜 그렇게 무심했을까 한숨이 깊다.

터벅터벅 그날이 그리워 걸었던 그 길을 걸었다.

다른 꽃을 알지 못하는 나에게는 그날의 어린 꽃이 그리워 걷기밖에 다른 할 일이 없었다. 걷고 쉬고 다시 걷다보니 어느새

발 아래 똑 닮은 갸냘픈 풀줄기가 하나 나 있다.


이번엔, 이번엔 내가 너를 품겠다며 아니 나를 좀 품어달라며 곁에 다가가 손길을 주었는데 영 시원치가 않다.

다른 사람의 손에 익어진 건지, 더 자랄 생각이 없는 건지, 부는 바람조차도 내 손에서 잎을 밀어버린다.

햇빛을 보라고 뿌리를 꺼내 남쪽을 향해 다시 심어주기도 하고 너무 가문 건 아닌지 오목한 손바닥으로 촉촉히 물도 주었는데

내 손톱 밑에 남겨진 이전의 짓무른 꽃잎 향이 남아있는 걸까, 손톱을 가리고

내 손이 너무 거친 건 아닌지 마른 모래를 손에 비벼봐도 어째 줄기엔 힘이 없다. 필요한 건 내가 아니었다. 내 것도 아니었다.


말 못하고 걷지도 못하는 생명에게 왜 너는 내 것이 아니냐 책망할 수는 없었다.

그저 그때의 연보랏빛 꽃잎과 촉감과 푸른 줄기의 까슬거림을 기억하고 추억하며,

그때나마 내 곁에 있어주어 내가 이렇게 너를 기억할 수 있구나 감사해하며,

언젠간, 언젠가는 네가 활짝 필 수 있도록 정말 큰 사랑을 주리라 괜스레 허공에 빈 손을 뿌리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제는 억지스레 혼자 아무데도 보지 않으며 걷고 있다.

풀 비슷한 무언가라도 살짝 보이면 피가 나도록 무릎을 꿇어 정신없이 바라보기만 할 나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지만

아직은 묵묵히 고개를 들어 또 다른 시야로 삶을 꾸려간다.

어떻게든 살아갈 것은 분명하지만, 소중한 것 없이 잘 살아갈 수 있을 지는 모르겠다.

모른 채 무언가 변할 내일이 오길 오늘도 고개를 들어 묵묵히 걸으며

또 다른 모습의 너가 피워낸 향을 맡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저 멀리 불어온 낯선 바람에 코 끝이 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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