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위 Nov 26. 2023

여유. 교동899. 고구마.

오후 네시. 퇴근시간이 아직 두 시간이나 남았는데 아내가 가게로 왔다. 글을 쓰고 오라며 집에 있는 노트북을 가져왔다. 나를 밖으로 밀어내며 교대해 준다. 아침 경포호수 산책길에 소설가의 글쓰기에 관한 대화를 했었다. 많이 보면 그리고 싶고, 많이 읽으면 쓰고 싶어 진다는 나의 이야기를 더해서.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을 그때그때 던지곤 하는데, 그걸 마음에 두고 있었나 보다.


"우리 인생이 바뀔 수도 있어"


 아내는 웃으며 무시무시한 농담을 한다. 집에 가서 눕고 싶은 관성이 크지만 이겨내고 카페로 왔다. 인생은 몰라도 오늘 하루는 바뀔 수 있겠다 싶어서.




"가게는 어쩌고요?"


 퇴근 두 시간을 남기고 가게 근처 카페에 왔다. 사장님 부부의 오랜 시간으로 가꾼 예쁘고 따뜻한 한옥카페 교동899. 매번 테이크아웃만 했더니 사장님이 걱정을 하신다. 얼마 만에 이런 여유를 즐기는지. 아니, 사실 시간은 차고 넘쳤었다. 주 4일 영업에 하루 5시간 근무. 게으른 마음이 시간에 쫓기고 있을 뿐. 발에 차이는 여유를 귀찮다고 걷어차고 있었다.


 말차라테 한잔을 시키고 차분히 가라앉아 보이는 구석 자리를 찾았다. 뭘 쓸지 생각한 건 없지만 일단 노트북을 꺼내 들었다. 이것도 내가 갖고 다니면서 글을 쓰려고 샀었다. 귀찮아서 밖을 나가지 않으니 곧 잊혀 버렸는데, 다행히 아내가 잘 사용해주고 있다.


 말차라테는 시키지 않은 까눌레와 함께 나왔다. 오랜만의 시간 충분히 잘 즐기라며 간식으로 주셨다. 한 번씩 영업이 끝난 시간 카페 옆을 지나갈 때가 있다. 불 꺼진 카페를 바라보면 차갑고 무섭다. 낮에 커피를 사러 왔을 때, 사장님이 보이지 않으면 카페가 낯설어진다. 기다리며 서있는 몸이 대면대면 하다. 이곳은 사장님이 있어 익숙하고 따뜻했나 보다.



"내 작업실 보여줄까요?"


 브런치에 올라온 글 몇 개를 읽고 있는데 사장님이 다가오셨다. 얼마 전 카페 안에 사장님만의 작은 공간을 만드셨는데, 용기 내어 보여주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사장님 얼굴에 새로 산 장난감을 든 아이의 설렘과 기쁨이 떠오른다.


 내가 앉아있는 자리 뒤로 작은 방이 하나 있다. 원래 손님들이 사용하는 곳이었는데, 지금 보니 그곳에 못 보던 창살문이 달려 있다. 안을 볼 수 없도록. 문 한편에는 <개인공간>이 써진 작은 나무팻말이 붙어있다. 가지런히 예쁜 창살문은 사장님 남편분이 직접 만드셨다고 한다. 카페 정원을 가꾸는 모습을 자주 봤는데, 이런 손재주를 가지셨다니 놀랍고 부럽다.



"일하다가 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해서 만들었어요."


 적당하고 알맞다. 작업실에는 작은 책상과 의자, 물감들이 있다. 벽에는 직접 그리신 그림들이 몇 개 걸려 있다. 방문 밖 한옥카페와는 완전히 다른 공간이다. 본 적 없는, 어린 시절 사장님의 방을 본 것 같다. 소설 속 시간여행이 이런 기분일까. 사장님과 가벼운 교류가 시작된 지도 벌써 몇 년이다. 작업실은 좀 더 자신을 돌보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사장님의 마음에 여유라는 단어가 자라난 것 같다. 나는 정말 기쁜 마음으로 '작업실 너무 좋아요! 잘하셨어요.'라 반응했다.



 다섯 시.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어떤 글을 쓸까 고민하다가 떠오르는 생각들을 기록했다. 이게 무슨 글인지는 모르겠지만 빈 공간이 글자로 채워지는 모습, 톡톡톡톡 키보드 소리가 좋다. 사라졌을 생각들을 남길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좋다. 이제 슬슬 일어날까 했더니 사장님이 군고구마를 주신다. 후와 후와. 뜨겁다 뜨거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