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 다녀올게."
"으... 아프겠다. 잘 다녀와."
오후 3시. 아내는 일본어 학원을 갔다가 차량점검을 맡기고, 부드러운 빵과 커피를 사는 바쁜 일과를 보내고 가게로 왔다. 이제 좀 쉬면 좋겠지만 나는 아내를 가게에 두고 치과로 향했다. 오늘은 2~3주마다 돌아오는 잇몸치료의 날. 치료의 통증보다 원장님의 반복된 잔소리가 더 고통스럽다. 내 남은 치아와 잇몸을 걱정해서 매번 좋지 않은 상태를 상기시켜 주신다. 우울할 땐 달달하거나 씹기 좋은 걸 먹어야 하는데, 그것도 허락되지 않는 날이다. 아직 두 번을 더 가야 하다니.
치료가 진행되는 동안 원장님은 왼쪽 아래 어금니의 상황이 좋지 않다고 했다. 두 개의 어금니 곁에 버티고 있는 사랑니 때문에 칫솔질이 어려운데, 잇몸스케일링도 잘 안된다고. 이게 내 노후를 책임질 어금니의 수명을 갉아먹고 있으니 사랑니 발치를 생각해 보라고 했다. 임플란트는 필요 없는 자리라 다행이라는 위로와 함께 말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와서 이래도 되는 걸까.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나. 어금니의 행복을 막아선 불륜의 사랑니 같으니라고!
캄캄한 치아 미래보고서를 받아본 나는 기분 전환이 필요했다. 서점에 들러 책을 둘러보고 싶었다. 책소비를 하면 기분이 나아질 것 같았다. 마침 찾아야 할 책도 있었다. 어제저녁 말글터라는 지역서점에는 그 책이 없어서 그냥 돌아왔었다. 오늘은 꼭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강릉의 또 다른 지역서점인 고래책방으로 갔다.
아내는 경주여행에서 사 온 임경선 작가의 에세이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를 완독 한 후 내게도 읽기를 추천했었다. 생각이 나와 비슷한 것 같다고 글 쓰는데도 도움이 될 거라고 하면서. 호기심을 참을 수 없어서 잠깐만 펼쳐보려고 했었다. 임경선 작가의 책은 처음이었는데 일이나 사람에 대한 생각들이 재밌어서 화장실도 참으며 한 시간을 읽고 나서야 멈출 수 있었다. 아내는 작가의 다른 책인 <태도에 관하여>나 <호텔 이야기>도 읽어보고 싶다고 했다.
한참이나 서가를 뒤졌다. 도서검색 컴퓨터에서 검색을 해도 책은 나오지 않았다. 강릉에서 가장 규모 있는 두 지역서점은 사이좋게도 스무 권이 넘는 작가의 책중 단 한 권씩만을 가지고 있었다. 베스트셀라나 학습지는 많았지만, 20년간 성실하게 활동 중인 작가의 책은 없었다. 믿기지 않는 현실에 탄식했다. 마취가 풀려 잇몸이 욱신거렸다. 이대로 돌아가긴 아쉬워서 <여름문구사>라는 책을 샀다. 제주도에 있는 여름문구사 사장님의 손글씨와 그림이 들어있었는데, 분명 아내가 좋아할 만한 책이었다. 아내에게 선물할 생각을 하니 다시 기분이 나아졌다.
"잠시 실례 좀 할게요."
"..."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 험난한 하루는 끝까지 나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불철주야 포교 활동에 바쁘신 종교단체 사람들이 말을 걸어왔다. 자기네도 실례인걸 알면서 당당히 실례를 하겠다 선포했다. 어이없는 마음을 가다듬고 온순히 실례를 거절하려고 했다. 걷는 내내 다물고 있던 입을 때려는 순간 갑자기 잇몸 통증이 심해져 인상을 확 써버렸다. 내 표정에서 뭔가 못 볼걸 봤을까. 그들은 말없이 곁을 떠나 주었다.
저녁 식사 후 약을 먹어서 통증은 사라졌다. 아내는 사고 싶었던 책은 아니었지만 좋아해 주었다. 한 번에 다 읽고서는 재밌다고 나도 읽어보라고 했다. 아내의 만족스러운 모습을 보니 아팠던 오늘 하루가 괜찮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