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아내는 보헤미안 박이추커피를 좋아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강릉 연곡면에 있는 본점만을 좋아한다.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워낙 많이 찾는 곳이라서 우리는 비성수기의 평일을 노려 방문한다. 좋아하는 만큼 많이 가지 못해 아쉬운 곳이다.
강릉 시내에서 출발한다면 시간이 걸려도 바닷길로 가는 게 정석이다. 강문이나 경포에서 시작해 사근진, 순포, 순긋, 사천까지 푸른 바다를 연이어 감상하며 올라가면 영진항이 나온다. 해변을 따라 들어선 카페들과 달리 박이추커피는 인근에 있는 작은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다. 좁은 길을 따라 차로 조금만 오르면 나오는 하얀 건물이 박이추커피다. 건물 뒤 주차장에 도착하면 짧은 오르막을 다시 걸어 올라가야 하는데, 세월만큼 무성히 자라난 덩굴들이 온 벽을 덮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덩굴의 모습은 사계절이 모두 달라 매력적이다.
입구를 마주하면 일본의 오래된 작은 카페를 보는 것 같다. 아담한 쇼윈도에는 빛바랜 원두봉투와 낡은 커피도구들이 있는데 장식이라 부르기는 소박하다. 그 아래에는 한글로 '보헤미안 커피'라고 쓰인 나무간판이 놓여 있다. 큰 글자의 영어간판이 있음에도 눈높이가 낮은 곳에 따로 한글을 둔 배려가 돋 보인다. 짙은 초록의 나무문을 열고 계단을 올라가면 드디어 카페 안이다.
카페에 들어서면 공간을 가득 채운 목재와 식물이 눈에 들어온다. 동시에 갈색 빛바랜 옛 음악들이 흘러 들어온다. 늘 반복되는 음악의 익숙함이 편안함을 더한다. 한발 안으로 들어서면 사람과 커피가 보인다. 카페 안은 따뜻하다. 자연광과 노란 조명으로 채워진 공간의 온도가. 작은 로스팅룸에서 조금씩 새어 나오는 열기가. 부지런히 움직이다가도 들어오는 손님을 반갑게 맞이하는 직원들의 온기가 따뜻하다. 사계절이 따뜻하다.
테이블에 앉으면 자연스럽게 창밖이 보인다. 저 멀리 영진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데, 파도 소리 없는 고요한 푸른빛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그대로 오래 머물러 있는 카페 안에서 나의 시간도 잠시 멈추는 듯하다. 커피를 주문하면 손글씨로 메뉴와 수량, 가격을 표시한 노란 영수증을 준다. 옛날 방식 그대로. 영수증 위쪽에는 '만약, 당신의 이해력이 둔해진다면 커피를 마시세요. 커피는 지적 음료입니다.'라는 문구가 적혀있어서 카페를 찾아온 모든 이들을 지적 존재로 만들어준다.
커피를 주문하면 로스팅룸 안에서 작업을 하던 할아버지 한분이 밖으로 나오신다. 백발의 안경 쓴 할아버지가 조용히 커피를 내리기 시작하면 카페 안은 새로운 커피 향으로 가득 찬다. 할아버지의 이름은 박이추다. 업계에서 흔히 '1서 3박'이라 불리는 1세대 바리스타 중의 한분이다.
박이추 바리스타는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직접 손님의 커피를 내린다. 본점이 목요일부터 일요일, 오후 5시까지만 문을 여는 이유다. 수익은 의미가 없다고 봐도 된다. 지점이 있고 공장도 있다. 이곳은 한 사람의 바리스타로서 수양과 소통을 위해 운영하는 공간이다. 커피는 재료나 기술이 아닌 '마음'이 들어가야 맛있다고 하는 사람. 마음이라니 쉬운 말 같지만 커피를 향한 그의 30년을 눌러쓴 글자다. 그 마음은 커피를 마시는 사람의 행복이라고 한다.
이 공간은 그런 박이추의 마음을 쏙 빼닮았다. 입구부터 인테리어, 메뉴판과 주문, 커피를 내리고 서빙하는 것까지 투박하고 예스럽다. 시대의 변화를 신경 쓰지 않으니 일면 고지식해 보이기도 한다. 요즘은 찾아보기 힘든 고집스러움. 유행처럼 번지는 대형카페나 본말이 전도되어 콘셉트에 매몰된 카페가 늘어날수록 이곳이 더 그립고 귀하게 여겨진다. 우리는 이런 박이추 커피를 애정한다. 언덕 위 하얀 등대처럼 단단히 그리고 오래도록 건강히 이 자리에 머물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