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부터 아내가 문화센터에서 한국화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수강생 대부분이 60대 이상인 수업이라 적응하기 쉽지 않아 보였다. 그래도 두 번 정도 더 다녀왔을 때쯤인가, 아내는 한국화 선생님이 수업에서 사용할 호(號)를 지어오라고 하셨는데 막막해서 고민이라고 했다.
시간은 가고 답이 나오지 않자 아내는 내게 미션을 넘겼다. 나의 옛 직업이었던 네이미스트 경력을 살려 심플하면서 아름답고 대중적이면서 전문적인, 세상에 없는 유니콘 같은 이름을 만들어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기업과 브랜드를 상대로 펼쳤던 내 기술은 아내의 이름을 지어주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미션이 주어졌으니 어떻게 되든 시도는 해봐야 했다. 이름을 만드는 기본적인 틀은 비슷할 거라 생각하며, 먼저 아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생각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를 조사했다. 간단한 인터뷰를 통해 속마음을 끄집어내고, 옆에서 오래 지켜봐 온 아내의 모습을 정리했다.
다음은 노동의 시간이었다. 국어사전과 한자사전을 펼쳐 단어를 수집했다. 한때 전염병처럼 번졌던 순우리말 이름은 배제했다. 순우리말 단어는 정보의 사실 여부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 딱딱하고 각진 글자와 발음하고 쓰기 어려운 글자도 제거했다. 지난한 과정을 거쳐 몇 개의 이름을 만들고 아내에게 후보 안을 보고했다. 다행히 나와 아내의 1순위가 일치했다.
"서유"
아내에게 새로운 이름이 더해졌다. 서유. 한자는 천천히 할 서(徐) 그리고 말미암을 유(由)다. 서(徐)는 '천천히 하다, 평온하다, 모두'라는 뜻을 가진 한자다. 유(由)는 '말미암다, 쓰다, 좇다, 행하다, 길'처럼 다양한 의미를 품고 있다. 상형자로는 어두운 방을 밝히던 등잔의 모양이다.
나는 아내와 한자가 품은 뜻을 조합해서 문장 두 개를 만들었다.
"평온한 빛으로 나와 타인을 따뜻하게 감싸주다."
"여유 있게 주위를 둘러보며 자신의 길을 걸어가다."
첫 번째 문장은 지금 아내의 모습. 두 번째 문장은 아내와 내가 바라는 앞으로의 모습이다. 다른 부부가 아이들의 이름을 지어주며 행복을 느끼듯, 나는 아내의 이름을 지으며 행복했다. 이름에 담은 바람대로, 아내가 지금처럼 서유한 사람으로 서유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