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에서 자주 언급하듯이 나는 커피를 정말 좋아한다. 맛있는 원두를 찾아 구매해 두었다가 매일 커피를 내려 마신다. 8년 전 연고 하나 없는 강릉에 자리를 잡게 된 이유도 바다와 커피였다. 강릉에서나 여행을 떠나서나 괜찮은 카페가 있다면 꼭 한번 방문해 맛을 본다. 로스터리 카페를 만나면 원두를 한번 사본다. 그러니 집에는 각각 다른 로스터리에서 탄생한 몇 개의 원두봉투가 나란히 놓여 있는 일이 흔하다. 커피에 대해 내놓을 만한 지식은 없다. 그저 입맛에 맞는 커피를 찾거나 먹어보지 못한 맛을 찾는, 소소한 과정과 그 커피를 마시는 시간을 좋아할 뿐이다.
나의 커피사랑은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로부터 시작됐다. 내가 열 살이 되기 전, 집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외갓집이 있었는데 우리 식구는 일주일에 한 번은 외가식구들과 모여 식사를 하고 놀았다. 식사가 끝나면 당연한 듯 커피타임이 시작되었다. 주로 외숙모나 엄마가 바리스타가 되어 커피를 탔다. 커피 둘 프림 둘 설탕 둘. 가끔은 내가 직접 만들어서 외할아버지께 드리기도 했다. 애들은 머리 나빠진다고 커피를 주지 않던 시절이었지만 외가는 괜찮았다. 커피는 고소한 향기에 속아 한 모금 마시면 써! 하다가도 금방 달달해졌다.
우리 아빠 김서방도 처가에서 처음 커피를 마셨다. 지금은 혼자서도 커피를 내려 마시는 아버지지만 그때는 달랐다. 김서방은 쓴맛이 나는 커피를 좋아한 적 없었지만 장인어른이 함께 하기를 권하니 참고 마셨던 것 같다. 아빠는 외할아버지를 무척 좋아했었으니까. 외할아버지는 커피를 마시며 식구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외할아버지에게 커피는 가족과의 달달한 소통이었다.
커피는 외할아버지에서 엄마에게로 전승되었다. 나의 10대 시절 엄마는 매일 하루 3번 커피를 마셨다. 아빠의 건강과 주저앉은 재정문제를 등에 없고서 자식들 앞길까지 닦아야 하는, 자신을 지워가며 매일 생존과 싸워야 했던 엄마였다. 엄마는 인상을 쓰고 있는 날이 많았는데 커피를 마시는 동안은 달랐다. 그건 하루 중 유일한 엄마의 시간이었다. 그때 엄마의 커피는 재생이었다.
다행히 내가 성인이 되었을 무렵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왔다. 이제 어머니가 되어버린 엄마는 카페를 찾아다니고 집에서는 직접 원두를 갈아 커피를 내린다. 인상은 글자가 잘 안 보이거나 나를 만났을 때나 쓴다. 위가 안 좋아지셔서 하루 3번 커피를 마실수는 없게 되었지만, 어머니는 이제 커피 본연의 맛을 즐긴다.
외할아버지와 엄마의 커피는 그렇게 3대를 내려왔다. 아내와 커피를 마시다 보면 가끔 두 사람 생각이 난다. 살아 계셨으면 좋은 커피친구가 되었을 외할아버지. 세상에 맛있는 커피가 이렇게 많아요 하고 원두를 사다가 내려드리면 좋겠다. 글을 마무리하는 지금 여행 중인 아내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어머니에게 연락이 왔다고. 집에 커피가 떨어져 가니 테라로사에서 대신 주문 좀 해달라고. 나는 외할아버지 몫까지 원두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