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정거장 부채 박스... 그 후

by 김민식

녹아내린 마쉬맬로우처럼 찐득한 눈으로 더듬더듬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 위로 오늘도 다른 지역에 폭우가 내리고 있다는 뉴스가 마구 쏟아졌다. 몸을 일으켜 무거운 암막 커튼을 걷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경주의 아침은 흐리기만 할 뿐, 비는 내리지 않았다. 오랜만에 버스를 타고 출근해야 하는 날이다. 우산은 필요 없을 것 같아서 다행이다. 버스를 타기에는 아무래도 빈손이 좋다.


회사를 다니는 보통의 직장인들은 이미 출근을 마친 때. 나는 배차 시간에 딱 맞춰 나와 버스를 탔다. 타는 곳은 차고지와 가까운 덕에 자리가 넉넉했다. 대신 이 시간대는 정거장마다 승객이 있어서 도착시간이 조금 늦어진다. 그리고 대부분이 나이가 지긋하시다. 버스가 섰다 가기를 반복하는 동안 교통카드 터치 알림음이 연신 '사랑합니다'를 외쳤다. 맑은 목소리가 사라진 버스는 언제나처럼 거칠게 내달렸다. 방금 전에 '사랑한다'라고 해놓고서는 고연령 승객들에게 버티는 힘을 강요하고 있었다. 앞으로 버스에서 살아남으려면 나도 운동이 필요할 것 같다.


곧 나만의 특별한 버스정거장에 도착한다. 며칠 전 버스가 그 버스정거장에 잠시 정차했을 때, 차창밖으로 보이는 벤치 위에는 흰색의 작은 플라스틱 박스 하나가 놓여있었다. 다이소에서 천 원이면 살 수 있는 그런 흔한 박스였다. 안에는 여름마다 여기저기서 나눠주는 손잡이 달린 동그란 부채 몇 개가 담겨 있었다. 아마도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더위를 식혀주고자 누군가 가져다 둔 걸로 보였다. 제 것 챙기기 바쁜 세상에 부채박스의 배려가 너무도 인상 깊었다. 나는 이 선행을 공유하고자 브런치에 글까지 올렸었다. 그리고 오늘, 1분 뒤면 다시 그 버스정거장을 지나간다.


-끼이이익!

-취이이이이...


버스가 앞문을 개방하고 버스정거장 밖으로 마중 나온 승객을 태우려 했다. 나는 서둘러 차창 밖을 스캔했다. 있다, 있어! 작고 소중한 플라스틱 박스가 오늘도 그곳에 보였다. 그런데 뭔가 잘못됐다. 벤치 위에 있었던 박스가 왜인지 땅바닥에 내려앉아 있었다. 게다가 안에 있던 부채도 모두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대신 더러운 플라스틱 커피컵과 휴지, 담뱃갑 같은 쓰레기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마치 처음부터 그러려고 둔 박스처럼.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버스정거장에서 사람의 선의가 확장되어 가는, 인터넷 커뮤니티에 가끔 올라오는 신비로운 광경을 고대하고 있었다. 벤치 위에는 전보다 커진 박스에 더 많은 부채가 꽂혀 있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시원하게 부채를 부치고 있는 그런 모습 말이다. 이타심을 끌어내고 이기심을 꽉꽉 눌러 넣는 폭력적 일상만은 아니었어야 했다. 아니, 그냥 가만히는 놓아두었어야지.


버스는 문이 채 닫히기도 전에 황급히 페달을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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