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정 아침, 당신의 덕담을 주고받는 방식은 무엇인가

by 민쌤

구정 아침, 당신의 덕담을 주고받는 방식은 무엇인가



구정 아침은 늘 비슷한 풍경으로 시작된다. 창밖은 조용하고, 집 안은 어딘가 분주하다. 밥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고, TV를 켜두고, 떡국을 먹고 나면 어느새 휴대폰 화면 속 카카오톡 알림이 하나둘 쌓여간다.


예전 같으면 전화가 울리고, 목소리를 통해 “새해 복 많이 받아”라는 말을 직접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은 대부분 카톡으로 인사를 나눈다. 아침부터 도착한 단체 메시지들을 읽다 보면 마치 명절이라는 분위기가 화면 속에서 만들어지는 느낌이 든다.


나는 사실 전화에도, 톡에도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귀찮아서일 수도 있지만, 그건 단순한 게으름이라기보다 내 성향에 가깝다. 나는 오래 통화하는 걸 잘 못하고,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하루를 소비하는 것에도 익숙하지 않다.


어쩌면 나는 관계를 ‘말’로 유지하기보다, ‘시간’으로 유지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예전부터 누군가와 길게 통화하거나 메시지를 주고받은 기억이 거의 없다. 내가 먼저 연락하지 않는다고 해서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고, 대화를 길게 하지 않는다고 해서 정이 없는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종종 그것을 오해한다.


나는 오히려 만나서 이야기하는 걸 더 좋아한다. 눈을 보며 말하고, 표정을 보며 웃고, 말의 뉘앙스를 확인하며 마음을 나누는 것이 훨씬 편하다. 그런데 메시지 속 대화는 다르다. 글자는 똑같아도 사람마다 감정을 다르게 읽는다. 어떤 문장은 그냥 지나가는 말이었는데 상대에게는 날카롭게 꽂히기도 하고, 별 뜻 없이 보낸 말이 오해로 번져 싸움이 되기도 한다.


나는 그런 일을 여러 번 겪었다. 그래서 점점 메시지에 지쳤고, 점점 짧게 말하는 사람이 되어갔다. ‘말’이라는 건 참 이상하다. 따뜻하게도 만들고, 차갑게도 만든다. 그리고 어떤 말은 덕담으로 남지만, 어떤 말은 상처로 오래 남는다.


생각해 보면 나는 늘 듣는 쪽에 가까웠다. 사람들이 하는 말들을 받아들이고, 그 말의 의미를 곱씹고, 마음속에서 정리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이가 들수록 나는 ‘듣는 사람’이 아니라 ‘선택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누구의 말을 마음에 담을지, 누구의 말은 흘려보낼지, 내가 어떤 관계에 에너지를 쏟을지, 그 기준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에게나 인사를 잘하지 않는다. 카톡이 와도 읽고 넘기는 경우가 많고, 전화가 와도 굳이 받지 않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내 안에는 분명한 기준이 있다.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나를 위해 애써주는 사람들이 있다. 말없이 나를 챙겨주는 사람들, 내가 힘들 때 티 내지 않아도 알아차려주는 사람들, 그리고 내가 흔들릴 때 내 자리를 지켜주려 했던 사람들. 나는 그 사람들에게만큼은 인사를 놓치고 싶지 않다.


모든 사람에게 완벽하게 인사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내가 먼저 마음을 전달하려고 노력한다. 그게 인사가 됐든, 선물이 됐든, 짧은 메시지 한 줄이 됐든. 고마운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혼자 살아낼 수 없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열심히 살아왔기 때문에 이 자리를 지켜낸 것도 분명하지만, 내가 무너지지 않도록 조금의 마음이라도 애써준 사람들이 있었기에 내 삶이 여기까지 왔다고 믿는다.


그 마음이 때로는 말 한마디였고, 때로는 따뜻한 밥 한 끼였고, 때로는 “괜찮아”라는 짧은 위로였을 뿐인데도 그것들이 나를 살게 했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더 잘 살아내고 싶다. 이전처럼 나를 몰아붙이며 버티는 삶이 아니라, 내 삶을 부드럽게 끌어안으며 살아가고 싶다.


명절은 결국 인사를 나누는 날이지만, 사실은 ‘내가 누구에게 감사해야 하는 사람인지’를 떠올리는 날이다. 그리고 그 감사의 마음을, 나는 조금씩이라도 표현하며 살고 싶다.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다. 결국 삶은 관계 속에서 완성된다.”

_알베르 카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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