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이 시작을 밀어낼 때

by 민쌤

끝이 시작을 밀어낼 때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듣고 싶지 않은 순간이 있다. 그 말이 틀려서가 아니다. 그 사람이 나빠서도 아니다. 그저, 더 이상 마음이 그 말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그 사람의 한마디에 하루가 달라졌다. 짧은 메시지 하나에도 마음이 설렜고, 별것 아닌 농담에도 웃음이 났다. 같이 걷는 시간, 함께 나누는 대화, 그 모든 순간들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 사람의 말은 언제나 옳았고, 그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이해하고 싶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말들이 마음에 닿지 않는다.


같은 말인데 다르게 들리고, 같은 행동인데 불편하게 느껴진다. 이상하다 싶을 만큼 감정이 식어버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처음에는 애써 모른 척한다. 내가 예민해진 건 아닐까, 잠깐 지친 건 아닐까, 조금만 지나면 다시 괜찮아지지 않을까. 하지만 마음은 알고 있다. 이미 예전과는 다르다는 것을.


좋아했던 기억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함께 웃었던 순간들이 거짓이 된 것도 아니다. 다만, 그 시간이 지나갔을 뿐이다.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같은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머물러야 한다고 생각할수록 더 빠르게 멀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더 힘이 든다.


좋아했던 만큼, 기대했던 만큼, 그만큼의 거리감이 지금의 나를 더 낯설게 만든다. 이제는 그 사람을 보는 것조차 마음이 편하지 않다. 대화를 나누는 것이 부담스럽고, 함께 있는 시간이 어색하다. 더 이상 노력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자꾸만 고개를 든다. 그리고 결국, 조용히 인정하게 된다.


“이제 그만 만나고 싶다.”


이 말은 상대를 향한 단정이 아니라 나 자신을 향한 고백일지도 모른다. 더 이상 억지로 이어가지 않겠다는 다짐, 내 마음을 속이지 않겠다는 선택. 관계를 끝내는 일은 누군가를 버리는 일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지키는 일일 수도 있다.


우리는 때때로 좋았던 기억 때문에 끝내야 할 관계를 붙잡고 살아간다. 하지만 관계는 추억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지금의 마음이 그 관계를 설명한다. 그래서 어떤 끝은 실패가 아니라 성장일지도 모른다.


좋아했던 시간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이제는 놓아줄 수 있는 용기. 그것이 어른의 관계이고 성숙한 이별일지도 모른다. 오늘의 나는 그 사람을 떠나보내려 한다. 미워서가 아니라 더 이상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 붙잡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붙잡을 이유가 사라졌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이 관계의 끝을 받아들인다.


“사랑이 식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만큼 용기 있는 일은 없다.”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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