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석제, <투명인간>, 창비, 2014
그는 내 존 재를 몰랐다. 지나는 시선으로라도 나를 보지 않았다. 그래 봐야 내가 걸치고 있는 복장과 장비밖에는 볼 수 없었을 것이지만. 그의 나이는 쉰 살이 넘어 보였으나 막 산골에서 걸어 내려온 소년 같은 인상이었다. 내 예상이 맞았다. 그는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내가 투명인간이 되기 전부터 알았다. 그것도 아주 잘, 속속들이, 머리부터 뱃속, 발끝까지. 뇌리에서 '김만수'라는 이름이 야구장 전광칸 1번 타자 이름처럼 번쩍 떠올랐다. 전광판을 장식하는 불꽃이 싸리비처럼 옆에 솟구쳤다가 스러졌다. 나는 알았다. 그 또한 투명인간이라는 것을. 나는 모른다. 그가 왜, 어떻게, 언제부터 투명인간이 되었는지를.(p.11)
만수가 태어날 때 난 정말 죽는 줄 알았다. 만수는 머리가 유난히 컸다. 나는 스무 살 때 결혼을 해 이듬해에 맏아들을 낳았고, 세 해 터울로 두 딸을 낳았다. 애를 셋쯤 낳아보면 태어날 아기가 배속에 있을 때 어떤 앤지 대충은 짐작이라도 하는 법이다. 그런데 만수는 하도 커서 쌍둥이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결국 무지막지한 산통 끝에 배 속에서 나올 때 머리통이 수세미처럼 길쭉하게 늘어져서 나왔다. 여기가 이승인가 저승인가 하는 중에 시어머니가 하는 말이 들려왔다.
"뭔 아가 대가리만 절구통겉이 크고 팔다리는 쇠꼬챙이겉이 빌빌 돌아가고 저카나. 저기 지대로 커서 인간이 될랑가 걱정이구마."
(p.11-12)
- 근데요, 형님, 전 정말 형님이 이렇게까지 안 되는 일을 하는 이유를 알고 싶어요. 그놈들한테 왜 빚까지 내 가지고 말도 안 되는 돈을 물어준 겁니까? 힘 있고 돈 있고 법까지 제 편인 개새끼들한테 계속 갈굼을 당하면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이유가 뭐예요?
만수 형님은 웃으며 대답했다.
- 내가 우리 일곱 명 책임을 져야 했으니까. 책임을 질 사람이 책임을 지는 게 올바른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내가 무식해서 정치도 모르고 법 같은 건 잘 몰라도 정의기 뭔지는 알아. 아, 이렇게 하는 게 맞다는 게 그냥 느껴지더라고.
(p.302)
- 어떤 사람이 투명인간이 되는지 정확하게 잘 모르겠다. 우리처럼 한가족이 전부 투명인간인 걸로 봐서는 유전적인 게 크게 작용하는 것 같다. 아, 따로 떨어져 사는 여동생이나 엄마는 투명인간이 아니다. 또 피 한 방울 나누지 않은 집사람이 투명인간이 된 거 보면 일단 한가족끼리 모여 산다는 게 중요한 거 같다.
- 같이 사는 환경이 결정적이다?
(p.3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