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옥돌의 책 글 여행 Apr 18. 2022

역사 속에 갇힌 사랑과 죄의식

<베른하르트 슐링크>, 책 읽어주는 남자, 시공사, 2013


며칠  과일을 잘못 사들고 집에 들어다. 얇고 매끈해서 천혜향인 줄 알았는데 껍질을 벗겨보니 레드 자몽이었다. 육즙이 풍부하고 단맛이 잠시 혀끝을 감돌더니 쌉싸래한 뒷맛이 작렬했다. 얼마 전 읽었던 <책 읽어주는 남자> 그런 느낌의 책이었다.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땐 흥미위주의 연애 소설로 예상했다. 그런데  다 읽고 난 후 여운이 딱 자몽 맛이었. 말랑해 보이는 사랑 이야기 안에 역사  전쟁이 남긴 죄의식, 문맹, 수치심 등의 단어들이 자꾸만 곱씹혔다.




<책 읽어주는 남자> 독일 현대 소설을 대표하는 작가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대표작이다. 법대 교수이자 판사이며 베스트셀러 작가다.  책으로 독일어권 소설 최초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하며 각종 문학상을 수상했다. 문학적 공로를 인정받아 2001년에 프랑스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았다. 2017년에 스티븐 달드리 감독에 의해 영화 <더 리더>로 제작되었다.



그녀의 말은 진심이었다. 나는 그녀가 나를 샤워실과 침대로 이끌기 전에 반 시간 가량 그녀에게 <에밀리아 갈로티>를 읽어주어야 했다. 이제는 나도 샤워하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내가 그녀의 집에 올 때 함께 가져온 욕망은 책을 읽어주다 보면 사라지고 말았다. 여러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어느 정도 뚜렷이 드러나도록 또 인물들에게서 생동감이 느껴지도록 작품을 읽으려면 꽤 집중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샤워를 하는 가운데 욕망은 다시 살아났다. 책 읽어주기, 샤워, 사랑 행위 그러고 나서 잠시 같이 누워 있기, 이것은 우리 만남의 의식이 되었다. (p.60)



이 책의 시대적 배경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 독일의 어느 도시다. 열다섯  소년(미하엘)과 서른여섯 살 여인(한나)이 거리에서 우연히 만나 운명적 사랑에 빠진다. 총 3부로 이어지는데 1부와 2, 3부의 내용 전개가 결을 달리한다. 1부는 소년과 여인의 운명적인 만남 이후 파격적인 사랑을 다룬다. 이들은 비밀연애를 하며 책 읽어주기, 샤워, 사랑 행위, 잠시 같이 누워 있기 등의 의식을 즐긴다. 이별 후, 2부에서 한나의 과거가 밝혀진다. 그녀는 2차 세계대전중에 나치 수용소에서 저지른 죄목으로 재판에 회부된다. 그녀의 가장 큰 죄목은 '수용소에 수감된 유대인 여자들을 이송 중에 한 교회에 가두어 모두 불에 타 죽도록 한 혐의'를 받고 있다.



 "당신은 당신이 수감자들을 죽음으로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까?"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사람들이 왔고, 이전 사람들은 새로운 사람들을 위해 자리를 양보해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은 자리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당신 그리고 당신 그리고 당신은 후송돼서 죽어야 해''라고 말했나요?"
한나는 재판장이 한 질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저는...... 제 말은...... 하지만 재판장님 같았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한나는 진심에서 그렇게 물은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달리 행동해야 했는지, 어떻게 달리 행동할 수 있었는지 정말 몰랐다. 그래서 그녀는 모든 걸 다 아는 것 같은 재판장에게 그 같으면 어떻게 행동했겠는지 듣고 싶었던 것이다. (p.143-144)

 


세월이 흘러 법대생이 된 미하엘은 재판장에 선 한나와 대면한다. 그녀의 과거를 직면하고, 자신이 나치 범죄자와 사랑을 나누었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한다. 부모 세대에 행해진 부끄러운 역사에 대한 죄의식이기도 하다. 한나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지켜보던 미하엘은 그녀가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문맹'이라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그녀나치 수용소에서 자신이 일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지 못한다.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자신이 맡은 아주 작은 일부분의 일을 진행한 것이다. 자신이 문맹이라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그녀는 거짓으로 죄를 인정한다. 그녀에게 '문맹'은 수치심이고 밝혀지면 안 되는 크나큰 비밀이기 때문이다.




<책 읽어주는 남자>는 열다섯 살 소년과 서른여섯 살 여인의 파격적인 사랑을 이야기하고자 함이 아니다. 가볍고 흥미로워 보이는 연애 소설 속, 나치 수용소에서 유대인에게 행한 자국의 부끄러운 역사를 담아다. 재판에 회부된 한나를 통해 역사 속 과오가 누구의 잘못인지 책임과 윤리에 대해 되묻는. 교도소에서 글을 깨우친 한나는 자신이  일의 의미를 자각하며 용서를 구한. 재판에 회부된 한나의 숨겨진 진짜 죄목은 '문맹'이다. 독일의 '나치 강제수용소 대학살'이라는 큰 죄목은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 걸까? 지난 역사를 회고하고 반성하며 새로운 내일을 만들어가는데, 생각에 생각거듭하게 하는 책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능숙해질 때까지 계속 춤을 추는 거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