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호, <모멸감>, 문학과 지성사, 2014
모멸감은
나의 존재 가치가 부정당하거나 격하될 때 갖는 괴로운 감정이며 한국인의 일상을 지배하는 감정의 응어리다.
일상생활에서는 모욕과 모멸이 거의 동의어로 쓰이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약간 뉘앙스가 다르다. 모멸은 '모욕'과 '경멸'(또는 멸시)의 의미가 함께 섞여 있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모욕은 적나라하게 가해지는 공격적인 언행에 가깝고, 경멸 또는 멸시는 은연중에 무시하고 깔보는 태도에 가깝다. 모욕에는 적대적인 의도가 강하게 깔려 있는 반면, 경멸에는 그것이 분명하지 않을 수도 있다. 아무 생각 없이 모욕하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무심코 경멸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모멸은 후자의 가능성까지 포함한다. 그런 의미에서 모멸은 수치심을 일으키는 최악의 방아쇠라고 할 수 있다.(p.66-67)
사람은 자신의 값어치에 대한 일정한 자아의식을 가지지 않고는 살아가기 어렵다. 우리 사회에서 우리의 값어치(남의 눈에나 자신의 눈에나), 사람의 값은 권력과 부와 지위에 의하여 정하여진다. 이것들은 우리 사회가 믿는 유일한 가치이다. (도덕적 자기 정당성의 느낌도 우리가 남달리 믿는 가치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가치의 추구는 사회구조가 오만과 모멸의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불가피한 것이 되기도 한다. 오만과 모멸의 사회체계에서 가해지는 수모를 피하며 자존심을 유지하려면 최소한도의 부와 지위를 확보하여야 하는 것이다.(p.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