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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돌의 책 글 여행 Jul 08. 2022

'그녀가 아는 것은 다 야생에서 배웠다'

델리아 오언스, <가재가 노래하는 곳>, 살림, 2019


카야가 비틀거리면 언제나 습지의 땅이 붙잡아주었다.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때가 오자 심장의 아픔이 모래에 스며드는 바닷물처럼 스르르 스며들었다. 아예 사라진 건 아니지만 더 깊은 데로 파고들었다. 카야는 숨을 쉬는 촉촉한 흙에 가만히 손을 대었다. 그러자 습지가 카야의 어머니가 되었다. (49쪽)



미국 남부의 노스캐롤라이나주 아우터뱅크스의 해안 습지를 며칠 동안 가슴에 품고 살았다. '한번 손에 들면 내려놓지 못할 경이로운 첫 소설'이라는 추천 평이 무색하지 않았다. 양서(良書) 한 권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감정이지만, 이번에도 책 안의 세계에 빠져들어 시공간을 넘나드는 소소한 기쁨을 누렸다. 야생의 습지, 그곳에 홀로 남겨진 여섯 살 소녀 카야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며 지독한 외로움과 본능적이고 인간적인 사랑에 대한 깊은 갈망을 음미했다. 다름 아닌, 델리아 오언스의  첫 장편소설 <가재가 노래하는 곳> 읽고서.




저자 델리아 오언스는 평생 야생동물을 연구해온 과학자다. 2018년 일흔이 가까운 나이에 첫 소설을 출간했다. 무명작가였던 그녀의 책은 출판 관계자들의 예상을 뒤엎고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리스트와 아마존 판매 순위 1위를  30주 넘게 차지했다. 또한 2019년 3월 4일, 웹사이트를 통해 백만 부 판매로 밀리언셀러에 등극했다. 그녀는 남아프리카를 여행하며 야생동물을 벗 삼아 평생을 떠돌며 살아온 경험을 여섯 살 주인공 카야의  속에 생생하게 녹여냈다.



1952년, 카야는 여섯 살이다. 다섯 아이 중 막내였고 언니 오빠들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 카야의 가족은 습지의 판잣집에 산다. 초창기 정착민들은 갈라진 해안선 사이에 아늑하게 자리 잡은 습지를 '대서양의 공동묘지'라고 불렀다. 남북전쟁 이전에 터전을 잡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만신창이나 빈털터리로 돌아온 남자들이 많았다. 그해 엄마가 아버지의 술주정과 폭행에 이겨 집을 떠나버리고 오빠와 언니들도 하나 둘 떠나버린다. 아버지마저 몇 년 뒤 소리 없이 떠나버리 카야는 사람들로부터 고립된 채 야생에서 살아남는 법을 터득해나간다.



 "아버지는 영영 가버렸나 봐."
 카야는 하얗게 핏기가 가시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엄마가 떠났을 때의 아픔과는 또 달랐다. 솔직히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려면 애를 써야 했다. 그래도 이제 진짜 외톨이라는 느낌은 막막하다 못해 윙윙 메아리쳤다. 정부에서 알게 되면 데리러 올 텐데. 아버지가 아직도 있는 척, 점핑한테도 거짓말을 해야 했다. (.......)
 남들한테 뒤지지 않으려고 카야는 촛불이나 달빛에 의지해 깊은 밤에 홍합을 땄다. 은은히 빛나는 모래밭에서 카야의 그림자가 흔들렸다. 홍합뿐 아니라 굴도 따고, 첫새벽이 밝자마자 일착으로 점핑에게 가려고 골짜기 근처에서 노숙을 하기도 했다. (97-100쪽)



홀로 남겨진 카야는 마을 사람들의 편견과 차별적인 시선이 담긴 마시 걸(습지 계집애)로 불린다. 정부 기관 담당자의 손에 이끌려 딱 하루 학교에 다녀온 카야는 또래들의 괴롭힘에 고립된 삶을 자처한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 숲 속 깊은 곳, 야생동물이 야생 동물답게 살고 있는 곳에서 뿌리내린다. 점점 더 고립되어 가는 카야에게 조디 오빠의 친구였던 테이트가 글을 가르쳐주고 독학으로 책을 읽을 수 있게 돕는다. 카야의 판잣집은 야생에서 표본 채집한 진열물로 가득 채워진다. 하지만 사랑의 감정을 일깨워준 테이트마저 학업을 핑계로 말없이 떠나버리고 카야의 상처와 외로움은 깊게 파인다. 이를 견디지 못한 카야마을에서 소문난 바람둥이 체이스의 유혹에 빠져드데...



그 후로 책을 아주 많이 읽었어. 대자연에, 저기 가재들이 노래하는 곳에서는 이렇게 잔인무도해 보이는 행위 덕분에 실제로 어미가 평생 키울 수 있는 새끼의 수를 늘리고, 힘들 때 새끼를 버리는 유전자가 다음 세대로 전해져. 그렇게 계속 끝없이 이어지는 거야. 인간도 그래. 지금 우리한테 가혹해 보이는 일 덕분에 늪에 살던 태초의 인간이 생존할 수 있었던 거라고.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 여기 없을 거야. 아직도 우리는 그런 유전자와 본능을 갖고 있어서 특정한 상황이 닥치면 발현되지. 우리의 일부는 언제까지나 과거의 그 모습 그대로일 거야. 생존하기 위해 해야만 했던 일들, 까마득하게 오랜 옛날에도 말이야. (295-296쪽)



여섯 살 '마시 걸(습지 소녀) 카야는 야생에서 배우고 보호받으며 매혹적인 마시 여자로 성장한다. 생태계의 짝짓기가 자연의 섭리이듯, 체이스의 거짓 사랑과 결혼 약속에 걸려들고 만 그녀  앞에 첫사랑 테이트가 돌아온다. 신뢰가 깨진 관계는 쉽사리 회복되지만, 테이트의 노력으로 그녀가 채집한 표본과 그림이 출판사를 통해 책으로 출간된다. 마침내 카야가 경제적으로 자립한 것이다. 책을 통해 소식을 접한 조디 오빠가 찾아오고, 어릴 적부터 야생에 관한 많은 것들을 알려준 오빠와 지난 이야기들을 나누며 위로받는다. 이렇게 카야의 삶에도 꽃길이 펼쳐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어지는 클라이맥스가 기다리고 있다. 체이스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되어 법정에 선 카야와 마시 걸(습지 계집애)이라는 주홍글씨로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 배심원들의 판결과 남겨진 반전의 뒷 이야기를 기대해볼 만하다.




자연은 인간을 떠나거나 배신하지 않는다. 인간이 자연과 생태계를 훼손시켜 스스로 재앙을 자초할 뿐이다. 우리는 인생을 어디에서 배워나가야 할까. 각자가 처한 환경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문명의 세계에서도 인간은 자연과 상생하며 살아나가야 한다는 사실이.


 '그녀가 아는 것은 다 야생에서 배웠다. 아무도 나서지 않을 때 자연이 그녀를 기르고 가르치고 보호해주었다.'(448쪽) 그녀 또한 사랑에 대한 본능적인 갈망과 가슴을 파고드는 외로움을 야생에서 온전히 해소하지 못했다. 세상으로 연결하는 테이트의 사랑과 부모처럼 돌봐준 흑인 점핑 부부, 조디 오빠를 통해 점차 회복되었다. 다시 한번 자연과 인간이 더불어 살아가는 공생 관계라는 걸 이야기의 힘으로 일깨워준다. 책을 읽고 난 후, 불현듯 잘 배합된 비빔밥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야생 생존기, 진부하다 못해 너무나 인간적인 사랑과 배신 뒤 딸려오는 미스터리 살인사건, 법정 스릴러, 사랑의 회복으로 숙성된 이야기의 맛을 내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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