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옥돌의 책 글 여행 Jun 12. 2021

그땐 몰랐어, 나만의 데미안이 너였다는 걸

<데미안> 헤르만 헤세 지음, 박지현 옮김

사람은 누구나 한번 태어나고 죽는다.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알을 깨고 나오려는 몸부림을 몇 번이나 반복할까. <데미안>이 출간된 지 100년이 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멸의 고전으로 불린다. 헤르만 헤세의 자전적 소설 <데미안>은 주인공 싱클레어가 알을 힘겹게 깨고 나오려는 내면의 갈등과 방황을 다룬다. 부모의 보살핌 아래 편안하게 자란 싱클레어는 뜻하지 않은 거짓말로 불량소년 프란츠 크로머에게 트집을 잡히고 지속적인 괴롭힘당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어둠의 세계에 깊이 발을 내딛는 싱클레어에게 새로 전학 온 데미안이 운명적으로 등장한다.




<데미안>을 읽으며 나 또한 자연스레 청소년기의 갈등과 방황의 감정소환했다. '그래, 나도 그랬어. 혼자 감당하기에 벅차고 외로웠어. 그런데 혼자라고 생각했던 순간에 나를 끌어준 나만의 데미안이 있었어'라고 혼잣말을 다. 여고에 입학하고 나는 질풍노도의 시기로 침잠했다. 1학년 4반이 된 나는 옆자리에 앉은 민지와 앞자리에 앉은 선미하고 친구가 되었다. 소심한 성격인 나와  달리 선미와 민지는 활달했다.


며칠 후 연극반에서 신입회원을 모집한다는 민지의 얘기를 듣고 셋이 함께 지원했다. 그런데 덩달아 따라갔던 선미가 합격했다. 연극반에 관심이 많은 민지는 뾰로통한 얼굴로 말없이 가버렸다. 다음날 민지는 합격한 선미의 흉을 봤다. 연극반 오디션 날 선미가 우연히 진행자로 참여 중이던 사촌언니를 만나 인사한 게 화근이었다. 민지는 선미가 실력이 안되는데 사촌언니 덕분에 붙은 거라고 소문을 냈다. 참다못한 선미가 민지와 말다툼을 벌였다. 내가 선미의 편을 들자 민지는 짝꿍인 내가 자기편을 들어주지 않는다며 토라졌다. 민지는 내 주변에 앉은 아이들하고 친한 척을 하며 나를 소외시켰다. 앞자리에 앉은 선미는 민지와 다투고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냉랭한 공기에 숨이 막혔다. 소심한 성격에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말없이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한 달이 지나고 자리배정을 다시 하면서 짝꿍이 바뀌었다. 하지만 내 주변에 누가 앉았는지 알고 지 않았다. 공부에 의욕을 잃었다. 쉬는 시간은 물론이고 수업시간에 선생님 몰래 책을 읽거나 시를 끄적였다. 나는 누구인가. 세상 속에 던져진 나라는 존재에 대해 고민했다. 나만 홀로 아이들과 동떨어져 내던져진 느낌이었다. 그런데 싫지 않았다. 아이들하고 나누는 대화가 오히려 시시했다.


점심시간이었다. 화장실에 다녀왔는데 교실 안이 소란스러웠다. 뒷자리에 앉은 영미 시를 낭독하고 있었다.  시였다. 내 얼굴이 빨개졌다. 당황해서 뺏으려고 했지만 키가 커서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때 앞자리에 앉은 현지가 영미한테서 종이를 받아왔다.

"시 잘 썼다. 이거, 나 줄래?"

현지는 시가 적힌 글씨 위로 하트 모양을 그리고 색칠을 하더니 코팅했다. 그럴듯한 책받침이 되었다. 그걸 보고는 몇몇 친구들이 내게 시를 써달라고 했다. 나는 현지와 시화전에 참여하며 종종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 나눴다. 그 후로 어쩐 일인지 나를 놀리던 영미와 민지의 태도가 바뀌었다. 복도에서 나를 만나면 괜스레 부딪히며 으스대던 민지가 말없이 지나갔다. 뒷자리에 앉은 영미도 더 이상 집적대지 않았다.


현지는 책을 많이 읽었다. 어느 날 <수레바퀴 아래서>라는  빌려줬다. 손 때가 묻은 낡은 책이었다. 빨간색으로 밑줄 친 문장이 많았다. 책 후반부절반으로 접힌 얇은 메모 있었다. 

'이제 곧 졸업이다. 일 년 내내 나를 괴롭히던 아이들로부터 벗어난다. 고등학교는 아주 멀리 갔으면 좋겠다.  속의 주인공이 나보다 훨씬 힘든 상황을 극복했다는  위로가 다.'

눈물인 얼룩진 자국이 번져 있었다. 나는 책을 읽고 내색하지 않은 채 돌려줬다. 이어 빌려준 책이 <데미안>이었다. 첫 장을 열자 막 쓴 듯한 메모가 붙여 있었다.


"새는 알을 뚫고 나오기 위해 싸운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여고를 졸업하고 현지는 그해 대학에 입학했다. 내가 졸업 후 컴퓨터 학원을 다니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한동안 연락이 없던 현지에게 전화가 왔다. 본인이 재학 중인 학과에 지원해보라고 했다. 정원을 두 배로 늘리고 실기 비중을 높였다는 정보를 줬다. 취업을 할지 공부를 할지 고민 중이던 나는 반수를 시작했다. 그리고 운 좋게 합격했다. 1년 선배가 된 현지와 학교에서 가끔 마주쳤지만 학년이 달라 길게 얘기를 나누지 못했다. 현지는 졸업하고 출판사에 취업했다. 그 후로 연락이 끊겼다.




여고 시절 3년은 나에게 실패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애써 지우려 했던 기억들이 다시 만난 책 <데미안>을 통해 의미된다.  시간은 과연 나에게 실패했던 시간이었을까? 누구라도 크고 작은 사춘기의 방황과 갈등에 맞닥뜨린다. 자기만의 세계에서 알을 힘겹게 깨고 나와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 성장통, 그 깊은 통증이 나에게 절대적인 시간이 되어 지금의 나를 마주하 있다. 나만의 데미안을 추억 속에서 소환하며 마음이 사뿐해진다.


'그땐 몰랐어, 나만의 데미안이 너였다는 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