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덕, <어느 외계인의 인류학 보고서>, 사계절, 2013
별들 사이로 태양의 위협이 도사리고, 번갯불 사이에 달의 침울한 분노가 서렸다. 별들은 전쟁에 시달리고 신은 싸움을 부추겼다. 태양이 있던 자리에 기다란 화염이 반란을 일으켜 나타나고, 달에서는 뿔이 두 개 뻗어 나오더니 궤도를 잃어버렸다. (.......) 별자리들도 궤도를 벗어나 사라졌다. (.......) 하늘이 스스로 몸을 흔들어 싸우는 별들을 쓰러뜨렸다. 별들이 아래로 떨어지자 대지가 불타고 바닷물은 이들을 급히 삼켰다. 그 뒤로 하늘에는 별이 나타나지 않았다.(p.12)
우리는 지구의 인류학자들이 작성한 자료를 토대로 지구인을 연구했다. 인류학은 지구인의 다양한 모습과 문화를 연구하는 학문이기에, 지구인에 대해 전혀 모르는 우리에게 참으로 유용했다. 인류학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지구인에 관한 정보를 알아내고 정리하느라 평생을 바쳐야 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구 인류학자들의 연구 덕분에 인간들의 생활 모습을 속속들이 파악할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을 한 권의 보고서로 만들었다. 이 보고서는 우리가 지구로 이주해서 자연스럽게 지구인처럼 살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p.1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