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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돌의 책 글 여행 Apr 10. 2023

자기 삶을 산다는 것

비비언 고닉, <사나운 애착>, 글항아리, 2021



침묵, 길고 긴 침묵이 흐른다. 우리는 또 한 블럭을 같이 걷는다. 침묵. 엄마는 가까이도 멀리도 아닌 허공을 바라본다. 나는 길을 인도하며 엄마의 걸음에 발을 맞춘다. 말을 하지도 엄마에게 말을 시키지도 않는다. 또 한 블럭 침묵이 흐른다. "그 조지핀 허브스트란 여자 말이다." 엄마는 말한다. 그 여자는 해냈고 행동했어, 그치?" (...) "부럽네." 엄마가 툭 하고 내뱉는다. "그 여자가 자기 삶을 살았다는 게 부러워. 나는 못 그랬다."(p.115)



사나운 애착평생에 걸친 어머니와의 애증을 그린 비비언 고닉의 회고록이다. 책은 회고록 분야의 새 장을 열었다고 평가될 만큼 자전적 글쓰기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차지하며, <뉴욕타임스>에서 지난 50년간 최고의 회고록으로, <옵서버>에서 20세기 100대 논픽션으로 선정됐. 널리 알려진 자전적 에세이들에서 보여준 글쓰기는 이른바 회고록의 부흥을 일으킨 사건으로 조명되며 시대를 초월한 고전으로 읽힌다. 뿐만 아니라 칼럼, 비평, 회고록 등 다양한 분야에서 독보적인 글쓰기를 보여주며 오랫동안 '작가들의 작가'로 불린다.




비평가이자 저널리스트, 에세이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비비언 고닉은 뉴욕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뉴욕 시티칼리지를 졸업해 뉴욕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아이오와대에서 논픽션 저술을 강의했다. 하버드대 래트클리프재단의 후원을 받았으며, 베스트아메리칸에세이상과 두 차례의 전미비평가협회상, 윈덤캠벨문학상을 수상했다. 1970년대 여성운동을 취재하며 <빌리지보이스>의 전설적인 기자로 이름을 알렸다. <뉴욕타임스> <타임> <네이션> 등에서 발표한 특유의 일인칭 비평은 자기 서사의 고백이라는 현대적 욕구를 반영하며 비평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비비언 고닉은  책에서 사나운 애착 관계로 형성된 어머니와의 애증을 써 내려간다. 그녀는 뉴욕 브롱크스의 유대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노동자 계층이 사는 대도시의 한구석에서 성장했다. 유년기의 중요한 기억을 형성하는 다세대주택에서 여섯 살 때부터 스물한 살 때까지 살았다. 스무 채의 빌라가 있는 4층 건물에 오직 여자들만 있었던 기억을 떠올린다. 자기를 알아가고 세상을 알아가는 어린 고닉의 유년시절, 이웃 여자들의 중심에는 엄마가 강렬하게 자리한다. 성인이 고닉은 엄마와 뉴욕 대도시의 블럭을 걸으며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시간 속에서 모녀가 함께 했던 삶을 회고한다.



이것이 엄마가 처한 삶의 조건이었다. 여기 이 부엌에서 당신이 누구인지 잘 안다는 것. 또한 이 부엌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지리멸렬해한다는 것. 이 부엌에서 엄마는 누구나 존경하고 감탄한 정도로 훌륭히 기능한다. 이 부엌에서 당신이 하는 일을 혐오스러워한다. 어쩌면 나중에 당신 입으로 말한 "여자로 산다는 것의 공허함"에 대한 분노를 키우고 있다. 그러다가도 골목에서 벌어지는 세상만사를 날카롭게 분석하면서 내가 아직도 기억하는 명랑하고 유쾌한 웃음을 터트린다. 아침에는 수동적이고, 오후에는 반항적이던 엄마는 매일 새로 만들어졌다가 매일 풀어져버리는 사람이었다.(p.26)



고닉은 엄마가 처한 삶의 조건의 한 공간으로 '부엌'을 떠올린다. 엄마에게 부엌은 "누구나 존경하고 감탄한 정도로 훌륭히 기능"하는 공간이다. 한편으로는 "여자로 산다는 것의 공허함"에 대한 분노를 키우는 공간이다. 엄마는 당신의 세계에 애정을 보이다가도 "일순간 어쩔 수 없이 이 생활로 끌려온 부역자처럼 느끼곤"(p.26) 다. 가정에서 여자로 사는 삶에 모든 감정을 쏟아부었던 엄마와 그 환경에서 자란 딸의 감정은 끈끈한 모정보다 사나운 애착으로 엮인다. "그러니까 네가 다 써봐라. 처음부터 끝까지, 잃어버린 걸 다 써야 해."(p.301)라고 말하는 엄마의 강철 같은 목소리가 가슴을 저민다.




고전의 반열에 오른 사나운 애착》은 가족 감정을 다룬 책들 중에서 가장 대담하고 심오한 책이다. 《사나운 애착》 만큼 엄마에 대한 기억과 감정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책은 드물다. 따뜻하고 끈끈한 감정이 아닌 거칠고 강렬한 애착이 내심 불편하면서도 엄마에 대한 기억들 입체적으로 끌어올린다. 가정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의 공허함"을 느끼면서도 치열하게 살아냈을 우리 모두의 엄마이자 여자의 삶에 짠한 감정이 솟구친다. 자기 삶을 살고 싶었던, 자기 삶을 살지 못했던 엄마이자 여자로서삶을 회고하게 한다. 이 책은 모녀 관계와 엄마의 삶을 돌아보고 싶은 분들과 자전적 글쓰기의 새로운 형식에 영감을 얻고 싶은 분들께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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