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비언 고닉, <사나운 애착>, 글항아리, 2021
침묵, 길고 긴 침묵이 흐른다. 우리는 또 한 블럭을 같이 걷는다. 침묵. 엄마는 가까이도 멀리도 아닌 허공을 바라본다. 나는 길을 인도하며 엄마의 걸음에 발을 맞춘다. 말을 하지도 엄마에게 말을 시키지도 않는다. 또 한 블럭 침묵이 흐른다. "그 조지핀 허브스트란 여자 말이다." 엄마는 말한다. 그 여자는 해냈고 행동했어, 그치?" (...) "부럽네." 엄마가 툭 하고 내뱉는다. "그 여자가 자기 삶을 살았다는 게 부러워. 나는 못 그랬다."(p.115)
이것이 엄마가 처한 삶의 조건이었다. 여기 이 부엌에서 당신이 누구인지 잘 안다는 것. 또한 이 부엌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지리멸렬해한다는 것. 이 부엌에서 엄마는 누구나 존경하고 감탄한 정도로 훌륭히 기능한다. 이 부엌에서 당신이 하는 일을 혐오스러워한다. 어쩌면 나중에 당신 입으로 말한 "여자로 산다는 것의 공허함"에 대한 분노를 키우고 있다. 그러다가도 골목에서 벌어지는 세상만사를 날카롭게 분석하면서 내가 아직도 기억하는 명랑하고 유쾌한 웃음을 터트린다. 아침에는 수동적이고, 오후에는 반항적이던 엄마는 매일 새로 만들어졌다가 매일 풀어져버리는 사람이었다.(p.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