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하게 그러나 단단하게>, 정영욱, (주)부크럼, 2023
상처의 깊이만큼 견디며 나아갔을
너를 생각하면 눈물겹다.
그 어떤 기적보다 기적 같다.
눈물겹게 거대한 감정을 견뎌 낸
당신이, 자랑스럽다.
난 긴 시간을 인내한다고 그 상처가 아문다거나 힘듦이 지나간다거나 하는 말들을 믿지 않는다. 여전히 나를 베어 버린 말과 행동들은 내 맘을 갈라놓을 것이며, 그 힘듦, 그대로 힘들 것이다. 그러나 믿는 것이 있다면 그 숱한 부정들을 인고한 시간만큼 나는 단단해지고 나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아물지 않지만, 그 상처가 별거 아니게 되는 만큼 내 마음이 크고 넓어지는 거라. 지나가지 않지만, 한 걸음 두 걸음 성큼성큼 지나치는 거라, 믿는다. 시간이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며, 부정의 순간이 나를 비껴간 것도 아니라고. 내가 견뎌 낸 거라, 그리고 버텨 낸 거라.
다 말하지 않아도 내 당신의 힘듦을 안다. 그렇게 믿고 꾸준히 나아만 가셔라.(p.14)
잊지 말라. 거기 죽어있는 건초도 언젠가는 초록이었다. 누군가는 삶을 다해 곧 저물어 가는 단풍이 가장 화려한 시기이다. 너, 거기 피었던 꽃임을 안다. 그리고 곧 맺게 될 열매임을 안다.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이 말한다. 곧 저물어 갈 낙화임을 알고 있어야 한다고. 뿌리 내릴 씨앗임을 기억하며 살아야 한다고. (...)
잊지 말고 알고 알아야 한다. 영원한 것 하나 없이, 그럴 때만이 있는 것임을. 젊음도 한때이며, 무너짐도 한때이며 찬란함도 한때이며 인고의 시간도 한때임을. 다시, 잊지 말라. 영원히 무너지지도 찬란하지도 않을 것임을.(p.172-1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