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도서에서 곁가지로 난 분야의 책을 눈여겨보던 중에 한 권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사회학자 이철승 교수의『쌀 재난 국가』라는 책이다. 연결점이 느껴지지 않는 세 가지 단어가 어떻게 이어질지 궁금증을 유발했다. ‘한국인은 어떻게 불평등해졌는가’ 라는 부제에 이끌려 책장을 열었다. 매일 식탁 위의 따뜻한 밥 한 공기로 삶의 온기를 전하는 ‘쌀’, 예고 없이 불가항력의 힘을 발휘하는 ‘재난’, 국민을 보호하고 통제하는 ‘국가’(있는 듯 없는 듯) 사이의 상관관계가 페이지를 넘기며 퍼즐 조각처럼 맞춰졌다. ‘쌀’의 근원지인 벼농사 체제와 위계 구조, 그 안에 내재한 재난 상황, 이에 대처하는 국가에 이르기까지 그물망처럼 촘촘히 엮인 한국 사회의 불평등 구조를 진단하고 ‘차별적’ 보상에 대한 가능성을 모색하는 책이다.
저자 이철승은 서강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복지국가, 노동시장 및 자산 불평등에 관해 연구한다. 2005년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에서 복지국가와 불평등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유타 대학교와 시카고 대학의 사회학과 조교수를 거쳐 시카고 대학교에서 종신교수로 2017년까지 근무했다. 2011년과 2012년 전미사회학협회 불평등과 사회이동, 정치사회학, 발전사회학, 노동사회학 분야에서 최우수 및 우수 논문상을 수상했다. 2019년에는 한국정치학회 학술상(저술 부문)을, 2020년 한국사회학회 최우수논문상을 받았다. 그 외에도 「세대 간 자산 이전과 세대 내 불평등의 증대」,「한국복지국가의 사회경제적 기초」 등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다. 저서로는 『노동-시민 연대는 언제 작동하는가』 ,『불평등의 세대』가 있다.
“우리는 누구인가. 한민족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험준한 산지가 대부분이고 충적토 평야라고는 다른 곳에 비해-조금 넓은 들판에 불과한 것들밖에 없는 곳에서(지형), 장마전선과 태풍이 잊을 만하면 찾아와 물 폭탄을 쏟아붓는 곳에서(기후), 유목 약탈족과 해구들이 식량과 자원을 찾아 급습하는 대륙과 해양 세력의 격전장에서(지정학), 다른 작물도 아닌 벼농사(주 식량)를 고집하며 한반도에 주저앉은 씨족들의 후손이다.”(47쪽)
저자는 네 가지 요소, 흙과 물과 식량 그리고 국가 간 세력 관계 중에서도 동아시아인의 주식인 쌀로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답을 찾아간다. 이른바 ‘쌀 이론rice theory’으로 “쌀을 재배하는 문화와 시스템”(p.48) 속에서 많은 것을 설명한다. 총 6장으로 구성해, 1장에서는 벼농사 체제의 출현과 재난의 정치를, 2장은 벼농사 생산 체제와 협업 속에 관계 자본의 탄생을, 3장은 코로나 팬데믹과 벼농사 체제를, 4장은 벼농사 체제와 불평등의 정치심리학을, 5장은 연공제와 공정성의 문제를, 6장은 벼농사 체제의 극복 방안을 위한 한국형 위계 구조의 개혁 플랜을 제시한다.
“우리는 쌀뿐만 아니라 연공제에 중독되었고, 연공제에 갇혀 있다. 연차에 따라 동일하고 표준화된 숙련의 상승을 기대하고 그에 따라 보상하는 연공제는, 벼농사 체제의 연령별 위계 구조만 이식한 결과다. 적어도 벼농사 체제는 (개별 소유를 통해) 개인별로 차등화된 노력에 대해 보상하는 기제를 내부적으로 갖고 있었다. 자연은 인간의 노력에 ‘차별적으로’ 보상한다. 전 세계에서 한국만 집착하고 있는 연공제는 이러한 개인적 노력의 차이조차도 무시하는 불공정한 제도다.”(359-360쪽)
연공제는 “동아시아 마을 공동체의 노동조직 원리를 그대로 가져와 보상 원리로 탈바꿈”(p.287)시킨 것이다. 근속연수에 따라 “표준화된 임금 테이블”을 기반으로 한다. 하지만 “벼농사 체제의 연령별 위계 구조만 이식한 결과”로 불평등을 만들었고, “인간의 노력에 ‘차별적으로’ 보상”(p.360)하는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며 불공정한 제도로 자리 잡았다. 동아시아 기업들의 오늘을 있게 해준 ‘인사 전략의 핵심 중추’였지만, 내일을 책임지기에는 ‘너무 오래된 구닥다리 마차’가 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견해이다. 이제 많은 조직에서 “성과와 능력에 따른 직능 보상 체계”를 연공제와 결합하고 있고, 결국 “개인별 성과와 능력에 따라 보상하는 합리적인 임금제도”(p.356)로 대체되리라는 것이다.
이 책은 한반도에서 고대국가가 형성되는 시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의 불평등 구조를 새로운 시각으로 제시한다. 벼농사 체제의 쌀 경작 문화권에서 발전한 한국 사회의 위계 구조와 협업 시스템이 어떻게 연공 문화와 불평등 구조로 형성되었는지, 수많은 자료수집과 데이터 분석에 근거해 진단하고 제시하는 점이 설득력을 더한다. ‘쌀, 재난, 국가’라는 세 가지 키워드의 상호작용을 긴밀하게 연결해 독자의 사고를 확장 시키는 점도 흥미롭다. 다만, 한국 사회의 ‘불평등’ 구조를 벼농사 체제의 쌀 경작 문화로 제한해 바라보는 점은 조금 아쉽다. 우리 사회의 ‘소득 불균형 상태’가 OECD 국가에 비해 높다 하더라도 ‘불평등’은 이미 전세계적인 추세이기 때문에 좀 더 복합적인 관점으로 바라볼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이 책을 통해 21세기 한국 사회의 불평등 구조를 심층적으로 이해하고 인식하게 되는 점은 유의미하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