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살에 처음으로 교회 문 앞에 섰다. 아랫집 사는 언니가 교회에서 선물을 준다고 해서 따라갔다. 시골집에서 2킬로 정도 되는 거리로, 들판을 지나 산너머 읍내에 있었다. 늦을까 봐 달음박질해서 교회 문 앞에 다다랐는데 아랫집 언니가 문을 열고 혼자들어가 버렸다. 당연히 내가 뒤따라 들어올 거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나는 닫힌 문 앞에 뻘쭘하게 멈춰서 버렸다.목조 건물 위로 올려다보이는십자가를 바라보며 교회 문을 열고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결국 뒤돌아섰다. 다시 산 너머들판을 지나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그리고는 까맣게 잊고 살았다.
나는 열세 살까지깡촌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산과 들 사이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마을을 이루었다.논농사밭농사로 먹고사는 한적한 마을이었다.간혹 어느 집에안 좋은 일이 생기면 굿판을 벌여 온 동네에 울려 퍼지기도했다.우리 집은 근심거리가있을 때면할머니가 밥상 위에 물 한잔을 떠놓고 두 손 모아 소원을 빌었다.어떤 날은 절에서 내려온 스님이 대문 앞에서 목탁을 두드렸다. 그러면 할머니가 쌀 한 바가지를 듬뿍 내어주며 두 손을 모았다. 그중에서 가장 의아했던 기억은 돼지우리앞에서 내가소원을 빈것이다. 시골생활에서 가장 불편한 곳이 재래식 변소(화장실)였다. 저녁을 먹은 후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으면화장실에 가고 싶었다. 할머니손을 붙잡고 플래시 빛에 의지해마당 끝에 있는 변소에 다다랐다.변소옆에 붙은 돼지우리와 닭장에서 인기척을 느끼고는 꿀꿀 꿀꿀, 꼬꼬댁 꼬꼬꼬, 시끄럽게 울어댔다. 볼 일을 보고 나면 할머니가돼지우리 앞에서 소원을 빌게했다.한밤중에 변소(화장실)오는 일이 없도록 소원을 빌라는 내용이었다.
할머니가 믿는 방식에는 딱히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 귀동냥으로 들었거나 전해져 내려오는 걸 따라 했다. 반면에 아버지는 역학을 배워마을 사람들 대소사에 재능을기부했다. 결혼 날짜를 잡는다던가 아이 이름을 짓는다던가 산소(묘지)터를 잡는다던가, 이러저러한 일을 도왔다. 아버지는새해가 되면책력이라는걸 사서 신년운세를 봐주셨다. '너는 인복이 있어서 잘 살 거야.' '너는 직업운이 있어.'좋은 내용만 마음속에 쏙쏙담아두었다.운세 보는일이 마냥 신기하고재미있었다.성인이 된 후로철학관, 점집, 타로점 등 운세 보는 걸 취미처럼즐겼다.어느 해에는 사주를 잘 본다는 스님을 만나러 절에 갔다가 불교를 종교 삼기도 했다.
그런세월을 지나, 내 나이 마흔 되었을 때 하나님을 만났다.자영업에실패하고 몸과 마음이 지쳐있을 때였다.불행이예고 없이 찾아와 내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듯, 믿음 또한 소리 없이 찾아와 마음을 평안하게 해 주었다.친구의 지속적인 전도로 하나님과의 동행이 시작되었다. 불현듯 어릴 적 아랫집 언니를 따라 달음박질해서 달려갔던 교회가 떠올랐다. 교회 앞에 멈춰 서 있던 나의 내면 아이도 비로소 그 문을 열고 들어갔다.메마른 내 영혼의 갈급함이 하나님 사랑으로 조금씩채워졌다.물론 갈등의 순간들도 많았다. 친정 부모님과 위아래층에 살던 때라종교적인 부침이한동안 지속되었다. 그럴 때마다 기도와 찬양 음악에 의지하며 극복해나갔다.믿음 안에서 내삶이서서히 상향 곡선을 타기시작했다.
예고 없이 찾아온 불행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하나님과 동행하며 회복되어 온 삶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때론극과 극을 오가며 널뛰기를 하는 게인생이다. 삶은 이성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과학적이지도 않다. 내의지를 붙들고 달려왔던 예측불허의삶에 백기를 들었다. 도대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인생길, 내의지만 믿고살지않기로했다. 내 의지를 내려놓는 일이 뻘쭘했지만하나님의세계로 내딛으며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믿는 마음, 믿는 구석이 있다는 건 이런 걸까. 믿음이 커질수록 내 안에 꿈틀대던 의지가 사그라들며 몸과 마음이가뿐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