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메모를 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예전에는 가족, 친구, 지인의 전화번호를 꽤 여러 개 외웠다. 기억에서 날아갈까 봐 나름의 규칙을 만들어 외우기도 하고 수첩에 전화번호를 적는 란이 따로 구분되어 있었다. 휴대폰이 등장하면서 이제는 저장된 번호를 찾아 누르기만 하면 되는 편리한 세상에 살고 있다. 메모하고 기억해야 할 내용들이 상당 부분 디지털기기 안으로 들어간 셈이다. 그런데 일상생활 중에 디지털 기기 안에 들여놓기 애매한,날 것의 내용들을 메모해야 하는 순간들이 있다.
나는 노트북 옆 작은 수첩 위에 늘 컬러풀한 포스트잇을 한 장씩 붙여놓는다. 작은 수첩 안에구체적인 내용을 메모하기앞서매일매일 진행할 투두 리스트를 포스트잇에 적는다. 재택근무를 하다 보니 일과 자기 계발과 집안일이 혼재되어일어난다. 요리 준비할 때 메인 재료와 부재료를 구분하듯투두 리스트를 그룹핑해서 적은 후 하나씩 지워나간다.메모가 이렇게 내 삶 가까이에서 하루의 문을 열어주고 있었다니 놀랍다.
'늘 가까이에 있어서 네가 나한테 소중한 존재였다는 걸 몰랐어. 이제야 알았어, 미안해.'드라마에 등장하는 대사를 '메모' 앞에서 중얼거리게 될 줄이야. 이런 생각을 이끌어낸 건 정혜윤 작가의《아무튼 , 메모》(위고, 2020)를 읽고 서다. "메모는 '준비'하면서 살아가는 방식, 자신만의 질서를 잡아가는 방식이다. 메모는 미래를 미리 살아가는 방식, 자신만의 천국을 알아가는 방식일 수도 있다."(162쪽) 메모가 내 삶의 동력이었다는 걸 깨닫게 해준 책이다.
메모에 대한 추억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20대 중후반 직장생활을 할 때였다. 사보편집 업무를 하는 과정에서매일매일처리해야 할 크고 작은 일들을 포스트잇에 맹렬하게 적고 밑줄 긋고 다시 쓰길 반복했다. 짬짬이 들여다보며 놓친 것이 없는지 재차 확인했다. 내 하루를 메모와 함께 준비하고 머릿속으로 리허설하고 실전에 돌입했다. 그러고 보면 메모는 꽤 오랜 세월 내 곁에서 인생의 나침반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다.
생각한 김에지금 나는 어떻게 메모를 활용하고 있나 찬찬이 돌아보았다. 메모 속에 나의 삶이 어떻게 담기고 있을지 궁금했다. 오프라인에 존재하는 포스트잇, 작은 수첩이 단기 기억의 저장소라면 디지털기기 안에서는 카카오톡(나에게) 메모와 컬러노트, 캘린더가 그 역할을 하고 있다. 다음 단계로 메모가 길어지거나 시리즈로 이어지면 나 홀로 밴드와 구글 킵 메모를 활용한다. 그다음 단계로 메모에살이 붙어 SNS 스토리로 확장되고 블로그와 브런치, 카카오 뷰 채널에서 장기 기억의 저장소가 된다.
이쯤 되면 메모는 내 인생의 리허설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하루하루 날 것의 재료가 다듬어지고 인생 양념에 버무려져 숙성된 맛을 내는 메모, 내 인생의 비서를 발견한 날이다. 내 인생의 친구를 만난 날이다.메모 속에 하루하루를 리허설하고 영혼을 담은 긴 문장으로 생명을 불어넣어 내 삶을 살찌운다. 아무튼, 메모하며 하루하루 의미 있게 완성시켜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