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인칭 단수>,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동네, 2020
하지만 때때로, 딱히 그럴 필요도 없는데 자진해서 슈트를 입고 넥타이를 매볼 때가 있다. 왜 그런가? 옷장을 열면 어떤 옷이 있는지 점검하다가(그러지 않으면 내가 어떤 옷을 가지고 있는지 잊어버리기에), 사놓고 거의 걸쳐보지 않은 슈트나, 세탁소 비닐에 싸신 드레스셔츠, 매본 자국 하나 없는 넥타이를 바라보는 사이 어쩐지 그 옷들에 '미안한' 마음이 솟구쳐서, 시험삼아 잠깐 입어본다. (...) 아무튼 실제로 그렇게 차려입고 나면, 이왕 슈트까지 입었는데 바로 벗어버리는 것도 재미없고, 이대로 잠깐 밖에 나가볼까 하는 기분이 든다. (217-218쪽)
그때는 문득 이런 감각에 휩싸였다. - 나는 인생의 회로 어딘가에서 길을 잘못 들어서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슈트를 입고 넥타이를 맨 내 모습을 바라보는 사이 그 감각은 점점 강렬해졌다. 보면 볼수록 그것이 나 자신이 아니라 처음 보는 다른 누군가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곳에 비친 이가 - 만약 나 자신이 아니라면 - 대체 누구란 말인가? (...) 그렇게 나는 지금 여기 있다. 여기 이렇게, 일인칭 단수의 나로서 실재한다. 만약 한 번이라도 다른 방향을 선택했더라면 지금의 나는 아마 여기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거울에 비친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 (223-22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