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옥돌의 책 글 여행 Nov 24. 2021

그날 나는 진짜 그곳에 있었을까

<일인칭 단수>,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동네, 2020


옷장을 열고 작년에 한 번도 입지 않은 코트를 꺼내놓는다. 옷장 속에 계속 묵혀둘지 옷 수거함으로 보낼지 결단을 내릴 참이다. 그러고 보면 사소한 일상에서도 선택과 결정의 연속이다. 까마득하게 잊고 지내다 이렇게 불현듯 옷장에서 코트를 꺼내놓은 건, 무라카미 하루키의 <일인칭 단수>(문학동네, 2020)를 읽고서였다. 하루키 작가의 글은 따라 하고 싶은 충동을 부추긴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스토리가 선명하게 그려진다. 결국 나는 이야기에 말려들고 만다. 꺼내놓은 코트를 걸쳐 입고 이리저리 거울을 들여다보다가 거리를 거닐며 소설 속의 주인공이 된다.



하지만 때때로, 딱히 그럴 필요도 없는데 자진해서 슈트를 입고 넥타이를 매볼 때가 있다. 왜 그런가? 옷장을 열면 어떤 옷이 있는지 점검하다가(그러지 않으면 내가 어떤 옷을 가지고 있는지 잊어버리기에), 사놓고 거의 걸쳐보지 않은 슈트나, 세탁소 비닐에 싸신 드레스셔츠, 매본 자국 하나 없는 넥타이를 바라보는 사이 어쩐지 그 옷들에 '미안한' 마음이 솟구쳐서, 시험삼아 잠깐 입어본다. (...) 아무튼 실제로 그렇게 차려입고 나면, 이왕 슈트까지 입었는데 바로 벗어버리는 것도 재미없고, 이대로 잠깐 밖에 나가볼까 하는 기분이 든다. (217-218쪽)



<일인칭 단수>는 무라카미 하루키 특유의 세계관과 감성이 드러나는 단편소설집이다. 책의 제목인 '일인칭 단수'를 비롯해 '돌베개에', '크림' 등 8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일인칭 시점인 '나'를 주인공으로 하는 8편의 단편소설 모두 우리의 삶 속에서 스쳐 지나가는 짧거나 긴 인연에 대해 에세이적인 느낌으로 풀어나간다. 그럼에도 미스터리에서 오는 주인공의 자기 성찰과 뜻밖의 결말이 가볍지 않게 이야기의 무게중심을 잡아준다. 그만큼 하루키의 글은 쉽게 읽히면서 생각의 깊이가 있다.



그때는 문득 이런 감각에 휩싸였다. - 나는 인생의 회로 어딘가에서 길을 잘못 들어서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슈트를 입고 넥타이를 맨 내 모습을 바라보는 사이 그 감각은 점점 강렬해졌다. 보면 볼수록 그것이 나 자신이 아니라 처음 보는 다른 누군가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곳에 비친 이가 - 만약 나 자신이 아니라면 - 대체 누구란 말인가? (...) 그렇게 나는 지금 여기 있다. 여기 이렇게, 일인칭 단수의 나로서 실재한다. 만약 한 번이라도 다른 방향을 선택했더라면 지금의 나는 아마 여기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거울에 비친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 (223-224쪽)




책을 읽으며, 까마득하게 오래된 추억 속의 한 남자가 떠올랐다. 스물한 살 쯤이었을까. 혼자만의 여행을 꿈꾸던 때였다. 당일치기로 어디를 가볼까 고민하던 끝에 인천 월미도 가는 전철에 몸을 실었다. 서울에서 두 시간 거리였지만 혼자만의 여행이라는 생각에 설렘과 두려움의 감정이 교차했다. 바다가 바라보이는 2층 커피숍 창가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책 한 권과 메모지, 볼펜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회색빛 바다 바라기를 즐겼다.


그러던 중에 1층 계단 앞에서 위를 올려다보고 있는 남자와 시선이 짧게 마주쳤다. 잠시 후 그 남자가 커피숍 문을 열고 내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리고는 동석해도 되느냐고 정중하게 물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음료를 주문하고는, 이렇게 불쑥 등장해서 놀라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시선이 마주쳤을 때 이곳으로 올라올 거라 예감했다고 담담하게 답했다. 나보다 서너 살쯤 많아 보이는 남자는 마른 체구에 키가 180은 돼보였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가는 음성이 지적인 느낌을 주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내 책(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그 당시 심취했던 크리슈나무르티의 책이 아니었을까 싶다)을 연결고리로 자연스레 대화가 이어졌다. 문학에 대한 이야기가 주였다. 내심 남자의 박식함에 놀랐지만 표현하지는 않았다. 자리를 옮겨 파전과 막걸리를 파는 주점에서 시와 소설에 대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 당시 나는 소설에 심취해 있었는데, 남자가 나에게 '시가 더 어울린다'는 얘길 했던 걸로 기억한다.


오후 햇살이 바다 위로 내려앉을 무렵,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가 차를 가져왔다며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순간 나는 마치 비현실 세계에 있다가 현실 세계로 돌아온 것처럼 남자를 만나기 전의 마음 상태로 돌아왔다. 바닷바람이 얇은 코트 사이로 스며들었다. 나는 지금 이곳에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이 남자는 누구지? 밀물과 썰물처럼 찰나적으로 감정이 흔들리다가 이내 평온해졌다. 나는 왔던 방식대로 전철을 타고 돌아가겠노라고, 남자의 호의를 정중히 거절했다. 남자는 한 번 더 권하더니 단호함을 느꼈는지 순순이 웃으며 인사하고 돌아섰다. 그날의 만남은 딱 그만큼이어야 했다. 혼자만의 여행에 남자가 우연히 등장했다가 퇴장해야 마땅한 일이었다.


지금은 그날의 기억마저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그날 나는 진짜 그곳에 있었을까. 그 남자는 실존하는 인물이었을까. 수없이 주고받던 이야기들은 밀물처럼 왔다가 썰물에 실려 기억 저편으로 떠나버린 걸까. 월미도 바닷가 거리, 커피숍과 카페로 이어지는 동선 안에서 남자와 나는 같은 장면을 수없이 재생하며 만나고 헤어진다... 언젠가 친구에게 그날의 에피소드를 이야기한 적이 있다. 다 듣고 난 친구(지금은 연락이 끊긴)는 '말도 안 돼.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해'라면서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치부해버렸다. 그렇게 힘을 잃었던 스물한 살의 에피소드는 <일인칭 단수>를 만나며 물 만난 듯 되살아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