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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돌의 책 글 여행 Jan 08. 2022

내 인생의 악역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었나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건 차가운 진실입니다. 그걸 알면 세상이 스산하게 느껴지죠. 그런데 그 진실이 주는 자유가 있습니다.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들의 반응에 일일이 신경 쓸  필요는 없으니까요.
- 욕망해도 괜찮아, <김두식>



누군가의 사랑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만 없다면 세상은 살만 하지 않을까. 하지만 세상은 나를 그냥 두지 않는다. 내 인생의 어느 모퉁이에 악역을 등장시킨다. 예고도 없다. 어느 부터 존재감을 드러내며 드라마틱하게 고통을 안겨준. 




20대에 인생의 악역이 처음 등장했.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첫 출근한 날이었. 담당 부서장이 한 남자 직원을 불러 나사수라고 인사시켰. 첫인상이 범상치 않았다. 150센티 정도의 작달막한 키에 얼굴만 도드라졌다. 목소리는 굵고 허스키했다. 그는 골초에 애주가였다.  당시엔 사무실에서 흡연이 가능했는데, 뒷자리에 앉아 담배를 피웠. 어느 날은 옆자리에 앉은 선배 언니가 건강검진 결과지를 받아 들고 그에게 쏘아붙였다.

"대리님, 사무실에서 담배 좀 그만 피우세요. 건강검진 결과에서 흡연 주의하라고 나왔어요. 간접흡연이 더 안 좋은 거 모르세요?"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맞받아쳤다.

"그게 왜 내 탓이야? 밖에서 담배를 피우는지 알게 뭐야."

그는 직선적이었다. 좋고 싫음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거의 매일 술을 마셨.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돈을 빌리기도 했다. 나한테빌려가 한동안 돌려받느라 애먹었다. 


그렇다고 그에게 단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술을 좋아하는 만큼 사람을 좋아하고 호탕한 구석이 있었다. 마음만큼은  딸 바보에 애처가였다. 무엇보다 자신이 맡은 업무를 잘 마무리했다. 하지만 혼자 하는 에 적격인 사람이었다. 그에게 업무를 배워야 했던 나는 속앓이를 다. 원고를 써가면 피드백 없이 빨간펜으로 긋고 수정하거나 본인이 다시 썼다. 표정으로 말하고 제스처로 답했다. 매 순간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라 마음을 졸였. 어느 날부터인가 사무실에 들어가기 전에 가슴이 답답하고 호흡이 힘든 증상이 생겼다. 큰 숨을 쉬고 숨 고르는 횟수가 늘었다. 건강에 이상 신호가 왔다. 건강검진에서 폐결핵 경증 진단을 받았다. 회사를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가 다른 업무를 맡으면서 팀이 분리되었다. 인고 끝에 봄날이 왔다. 건강도 점차 회복되다.


그 후 1년이 지나 팀장과 팀원으로 다시 한 팀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이전의 내가 아니었다. 좋고 싫음을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을 만큼 단단해져 있었다. 그는 더 이상 내 인생의 악역이 될 수 없었다. 편협하고 이기적이고 그릇이 작은 소인배에 불과했다. 퇴사하고 난 이후에는 그를 더 이상 만날 이유가 없었다. 마침내 내 인생의 무대 위에서 그를 퇴장시켰다. 




끝이 없는 고통은 없다. 시간이 약이다. 세월이 흘러 내 인생의 악역은 삶의 밑거름으로 거듭난다. 경험이라는 맞춤옷을 입고 한 겹 한 겹 마음의  면역력을 높여준다. 생의 한가운데에서, 또 다른 모습의 두 번째  번째 악역을 언제 또 만날는지 알 수 없다. 그럴 때마다 토닥토닥, 다독이며 나의 길을 걸어가면 된다.



괜찮아.
이 또한 지나가는 과정이야.
인생에 희로애락이 있듯 사람 관계에서도 나를 힘들게 하는 악역이 존재하기 마련이야.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잘 지내야 할 이유는 없어. 편협하고 이기적이고 포용력이 없는 당신이  불쌍한 사람이야.
더 이상 나는 당신에게 관심 갖지 않을 거야.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는 나의 길을 걸어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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