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의 구원> 한병철
<아름다움의 구원>을 샀던 이유는 첫번째로 한병철 교수가 썼기 때문이고 두번째로 제목이 내 마음을 콱 잡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책도 얇았기 때문에 책을 샀지만 한병철 교수의 책은 언제나 어렵다. 특히나 미학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려고 노력을 했지만 완벽하게 이해하는데는 실패했던 것 같다. 그러나 <아름다움의 구원>이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셀카나 포르고그래피 혹은 페이스북의 좋아요와 같은 것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매끄러움의 사회는 바로 긍정사회
한병철 교수는 책을 시작할 때 제프 쿤스의 작품을 예로 들며 매끄러움에 대해서 설명을 한다. 그는 '매끄러운 표면 안쪽에는 숨겨진 내면성이 전혀 없다.'라는 이야기를 한다. 가끔 생각하지만 한병철 교수의 책은 어렵다. 그래서 내가 이것에 대해서 이해한 바로는 우리는 수없이 많은 셀카를 찍는다. 페이스북에는 45도 각도로 큰 눈으로 자신을 찍어 내리고 보정이라는 기능으로 많은 잡티를 제거해 버린다. 내가 사용하는 갤럭시 S6는 놀라운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내가 내 얼굴을 찍었는데 너무 이쁘게 나오는 것이었다. 마치 한 마리의 꼬부기 같이 나왔다. 이런 셀카 속에서 나는 내가 아니게 되어 버린다. 셀카의 나는 아름다운 미청년이 되어버리지만 현실의 나는 아재 그 자체이다. 셀카 속에서 매끄러운 피부를 가진 여성들을 볼 때면 '와 예쁘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 셀카를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단지 그녀는 예쁘다 밖에 없다. 한병철 교수는 근대의 미학부터 미와 숭고함이 나뉘기 시작했다고 한다. 미는 그 자체로 아름다움을 의미하지만 숭고함이라는 것은 그 내면 속에 숨겨진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키는 그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셀카를 보면 우리는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지만 숭고함은 느끼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반 고흐의 자화상을 보았을 때 거친 붓 터치와 자화상 속의 그의 고뇌 속에서 우리는 그가 예술가로 살면서 그림을 그리는데 괴로움과 고통을 느끼게 된다. 그의 눈 빛 속에서 우리는 그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고 그의 그림은 아름다움을 가지게 된다.
또다른 매끄러움 포르노그래피와 브라질리안 왁싱
현대 사회 속에서 포르노그래피는 인간의 성기에만 집중을 한다. 매끄러운 여성의 몸 속에서 인간의 시선은 여성의 성기에만 집중을 하게 된다. 브라질린안 왁싱 또한 매끄러움의 또다른 상징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털이라는 것은 불결하고 원시적인 것으로 인식되어 진다. 이성의 논리를 통해서 그런 원시적이고 동물적인 것을 제거하는 것이 진정한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이런 원시적인 동물성을 제거해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동물성이라는 것은 인간의 한 부분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이성적인 존재인 동시에 동물성을 가지고 태어나는 존재이다. 포르노그래피나 브라질리안 왁싱은 인간의 미를 추구하지만 그것은 인공적인 아름다움일 뿐이다. 한병철 교수가 말하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자연 그 자체로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포르노그래피를 예로 들자면 진정으로 야한 장면은 성기를 보여주지 않고 은폐되고 그것을 통해서 상상할 수 있는 야한 장면이 바로 아름다움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은폐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어서 인간을 생각하게 만든다.
진정한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미와 숭고함이 함께 가는 것
한병철 교수가 책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절망과 상처를 가지고 사는 삶 자체가 아름답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은 이 책을 하나로 설명할 수 있는 사례이다. 보들레르의 시를 읽으면 세상은 더럽고 답답하고 괴로운 곳이다. 그의 시 <알바트로스>에서 알바트로스라는 새는 날개가 찢어지고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당한다. <고통의 연금술>에서도 그는 황금이 치장된 삶 보다는 비석을 깎아 내리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곤 한다. 그의 시를 읽으면 세상은 불결하고 인간이라는 존재 또한 완벽하지 않고 개같은 존재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의 시 속에서 인간이라는 존재는 아름다움을 획득하게 된다. 이런 괴로운 사회 속에서 비록 죽어갈 수 밖에 없는 존재이기는 하지만 내가 세상에서 죽어가기 때문에 인간이라는 존재는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괴로운 세상 속에서 내가 인간으로 살아가려는 그 의지가 인간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다. 그때 인간은 숭고함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간단히 이야기하면 한병철 교수는 이 시대가 긍정 사회이지만 그 이면에 있는 부정적인 것들을 내가 받아들이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아름다움을 넘어 사회 속으로...
지금 우리 사회는 매끄러움의 사회 속에 놓여있다. 우리는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을 통해서 즉각적으로 소비될 수 있는 것만을 좋아한다. 이것이 문제인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소비 사회 속에 자신을 가두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에 대해서 한 번이라도 생각하기 보다는 내가 어떻게 사람들에게 보여질지 그리고 소비될지에 대해서만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런데 내가 페이스북이나 카카오톡에 수없이 많은 셀카들을 볼 때 느끼는 것은 나의 이상적인 모습에 갇혀 더 이상 세상에 대해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하루에 몇 시간을 내가 어떻게 보일까하는 생각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아름다운 사진 속에 나는 언제나 긍정적이고 예쁘기만 한 모습을 보면서 책에서 말했듯이 현대인들은 살아있는 좀비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내가 찐짜같고 찌질해 보이는 것도 나의 모습이다. 그 모습을 감추는 것은 사회의 깊이를 얕게 만드는 것일 뿐이다. 진정으로 나를 사랑한다면 나의 못난 부분까지 사랑하는 그런 사회가 오히려 깊이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