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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성 Sep 28. 2016

오이디푸스 왕 <소포클래스>

고전을 읽어야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소포클래스의 <오이디푸스>는 비극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고대 그리스 시대의 비극들은 후대의 많은 사람들과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꼭 한 번은 읽어야 할 작품이다. 먼저 그리스 시대의 비극은 당연히 서사를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형식성을 아는 것이 책을 읽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먼저 비극의 구조는 도입부(플로로고스), 라로토스 (합창단의 등장가) 그 다음 에페이소디온 (노래 사이에 끼어 있는 대화) 즉 삽화를 의미한다. 그 다음 정립가가와 삽화가 계속 이어진다. 마지막은 엑소도스로 (결말부)로 끝이난다. 즉, 무식하고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처음에 도입부에서 주제의 맥을 잡아준다. 그 다음 코러스 부분이 등장하면서 노래를 하는데 코러스가 시작되는 부분을 한 챕터의 시작이라고 생각하고 그 다음 이야기가 이어진다. 즉, 도입이 있고 노래와 이야기, 노래와 이야기, 노래와 이야기 그리고 결말부로 극이 끝난다고 보면 된다. 다음으로는 비극 극장의 구조를 봐야 한다.





먼저 그림에 parados라는 부분이 있는데 그곳을 통해서 코러스들이 등장한다. 책을 읽다 보면 가령 (좌1) (우1) 이런 것이 있는데 코러스가 왼쪽에서 등장한다. 오른쪽에서 등장한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orchestra라는 부분은 악기들이 있는 곳이고 지금의 오케스트라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 다음 Galerij라는 부분에는 가건물이 들어서는 곳이다. 즉, 이 가건물 앞에서 인물들이 연기를 펼치는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 비극을 보면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그리고 배우들의 합작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그리스 비극은 뮤지컬과 비슷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비극을 보면서 무엇을 느껴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카타르시스다. 명예로운 귀족 혹은 상위 계급의 파멸을 통해서 극을 보는 사람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카타르시스를 해석하면 정화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데 느낌있게 젊은 층의 말을 빌리자면 '사이다'같은 느낌이다. 우리가 인터넷 용어에서 '그 말 참 사이다네'라는 늬앙스처럼 카타르시스를 한국말로 번역하려 애쓰지말고 사이다의 그 톡 쏘는 느낌을 책을 읽거나 연극을 보면서 느껴야 한다.


오이디푸스의 오만함


책을 쭉 읽다보면 오이디푸스는 매우 오만하고 거만하다. 왜냐하면 그가 스핑크스의 수수깨끼를 풀었기 때문에는 그는 왕 중의 왕이다. 첫 장면에서 사람들은 오이디푸스에게 역병이 돌고 있다고 그 원인을 찾아 달라고 한다. 그리고 오이디푸스는 역병의 원인과 테바이의 왕(오이디푸스의 아버지이지만 여기서 오이디푸스는 선대 왕이 자신의 아버지인지 모르지만 관객들은 다 알고 있음)을 죽인자를 자신이 찾겠다고 호언장담한다. 그 다음 코러스가 등장하면서 첫번째 챕터의 시작을 알리는데 코러스의 역할은 노래를 통해서 관객의 마음 속에 있는 말을 하거나 어떤 인물의 편들 들거나 혼자 떠들면서 설명을 하기도 하고 주제를 냉큼 알려주기도하는 역할을 한다. 코러스 앞 부분까지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지도 모르고 호언장담을 한다. 즉, 그리스 비극에서는 코러스가 등장하기 전의 서사를 잘 해석하면 주제를 알 수 있다. 여기서 오이이푸스는 자신의 존재가 자신의 친부를 살해했고 어머니와 결혼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리고 그의 오만함이 그를 점점 비극 속으로 몰아가기 시작한다.


장님 테이레시아스는 진실을 보다


질베르트 뒤랑의 <상상력의 인류학적 구조>를 보면 서양에서 장님들의 상징은 무지를 상징한다. 그러나 이 비극에서는 오히려 테이레시아스가 눈을 뜨고 있는 오이디푸스보다 진실을 볼 줄 아는 인물이다. 오이디푸스는 테이레시아스에게 역병의 원인이 무엇이고, 왕의 시해자가 누구인가에 대해서 캐묻는다. 그러나 테이레시아스는 그의 물음에 답하지 아니한다. 그런 답을 들으면서 오이디푸스는 계속 열불을 내면서 그를 괴롭힌다. 그러면서 테이레시아스는 오이디푸스에게 '크레온은 당신에게 아무 재앙도 아니오, 당신 스스로 자신에게 재앙이지.'라는 말을 남긴다. 테이레시아스는 오이디푸스에게 진실을 이야기하지만 그는 그의 말을 무시한다. 여기서 역설이 일어나는데 서양에서 무지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장님은 오이디푸스에게 무지를 알린다. 오디푸스의 무지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오만하다. 나중에 오이디푸스가 눈을 봅아 버리는 장면은 이 장면과 많은 연관성을 보인다고 생각한다.


나의 아내이자 어머니인 이오카스테


테이레시아스와의 장면이 끝나고 코러스가 나온다. 코러스가 나온 직후 오이디푸스의 동생 크레온이 나온다. 크레온이라는 인물은 매우 합리적인 인물로 묘사되는데 <안티고네>에서도 나온다. 여하튼, 오이디푸스는 크레온을 의심하지만 그때 오이디푸스의 아내인 이오카스테가 등장해서 오이디푸스를 말린다. 오이디푸스는 테이레시아스가 말했던 것을 이오카스테에게 이야기한다. 그러자 이오카스테는 선왕이자 자신의 남편이었던 선대 왕에 대해 설명하자,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죽였던 왕이 이오카스테의 남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도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왕의 시해자인 것만을 깨달았을 뿐, 자신이 아버지의 아내와 결혼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는 아직도 자신이 코린토스 왕국의 왕자인줄 알고 있다. 그때 코린토스의 사자가 등장한다. 코린토스의 사자는 오이디푸스를 입양한 사람인데 그는 너스레를 떨며 오이디푸스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이때도 오이디푸스는 상황파악을 못하는데 이때 이오카스테는 그 상황을 이해하고 충격을 먹어 버린다. 그리고 코러스가 이어진다.


하인의 슬픔과 어머니이자 아내의 죽음


오이디푸스 앞에 라이오스(오이디푸스의 아버지)의 하인과 크린토스의 사자와 삼자대면을 한다. 여기서 하인은 리이오스 왕의 지시를 어겼었는데 라이오스 왕은 신탁을 듣고 자신의 아들이 자신을 죽이고 자신의 아내를 취할 것이라는 신탁을 받는다. 그리하여 오이디푸스를 버리라고 하는데 이때 하인은 아기가 불쌍해서 오이디푸스를 크린토스 왕국에 입양시켜 버린다. 모든 배후를 알고 있는 하인은 끝까지 함구하려고 하지만 닥달하는 오이디푸스에게 진실을 말하고 클라이막스로 넘어간다. 그때 전령이 달려와 이오카스테가 자살했다는 것을 알린다. 이오카스테 앞에 간 오이디푸스는 그녀의 장식품으로 그의 눈을 찔러 버린다.


오이디푸스 : 그것은 아폴론이었소, 아폴론이오, 친구여. 나의 불행을, 불행을, 나의 고통을 완성한 것은. 하지만 눈을 직접 찌른 것은 누구도 아니고 가련한 나였소. 왜 그랬냐 하면 - 내가 눈을 뜨고 있을 이유가 무엇이겠소? 앞을 보더라도 아무런 즐거울 게 없을 이 사람이? (오이디푸스, 민음사 p105)


여기서 오이디푸스가 정말 멋있게 나오는데 오이디푸스는 운명과 신이 내린 형벌을 자신이 이고 가겠다고 다짐한다. 이 장면은 현대에서도 많이 보이는데 내가 거의 10번은 넘게 이야기한 알베르트 카뮈의 <시지프스 신화>나 <이방인>에서 그 주인공들이 부로지한 세상 속에서 형벌을 당하지만 그 속에서 자신의 의지로 형벌을 받겠다는 그 모습이 오버랩이 되어진다. 이러면서 최고 권력자였고 오만했던 오이디푸스는 파멸해 버리게 된다. 여기서 사람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비극의 왕 오이디푸스의 질문... 나는 누구냐?


코로스 : 오, 조국 테바이의 거주자들이여 보라, 이 사람이 오이디푸스로다. 그는 그 유명한 수수께끼를 알았고, 가장 강한 자였으니 시민들 중 그의 행운을 부러움으로 바라보지 않은 자 누구였던가? 하지만 보라, 그가 무서운 재난의 얼마나 큰 파도 속으로 쓸려 들어갔는지. 그러니 필멸의 인간은 저 마지막 날을 보려고 기다리는  동안에는 누구도 행복하다 할 수 없도다. 아무 고통도 겪지 않고서 삶의 경계를 넘어서기 전에는. (오이디푸스, 민음사 p116)


<오이디푸스>를 읽으면서 그의 이야기는 곧 자신에 대한 물음이었다. 그가 자신에 대해서 알게 되면서 그의 삶은 비극으로 끝났지만 이 비극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이렇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질문을 하는가? 우리는 언제나 바쁘게 살아간다. 특히나 목적이라는 것을 말하면서 '나는 이것을 함으로 배웠고 나는 ~가를 이루겠다'라며 말이다. 특히나, 현대 사회에서는 어떤 대학에 가서 성취하고, 어떤 기업에 가서 성취하고, 또 성취하고 배우고 하는 일을 계속 반복한다. 그러면서 등한시 되는 것이 나란 존재에 대한 질문이다. 그 질문을 하고 안 하고의 차이는 클 것이라고 본다. 아무리 내가 성취하고 계속 무엇인가를 가진다고 해도 그 안에는 허무함이 있다. 왜냐하면 그 속에는 내가 없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알고 성취를 한다면 그것은 가치가 있겠지만 나 자신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 없이 모든 것을 외적인 것에서만 찾는 것은 허무함을 증대시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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