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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성 Nov 25. 2016

언론에 찢어져 버린 그녀의 명예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하인리히 뵐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사회에서 특히 언론이라는 것이 한 여성을 파멸시키는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 선량한 가정부이면서 자신에게 생기는 수입을 알뜰하게 쓰는 여인, 또한 좋은 머리를 가지고 있는 여인, 언제나 인생을 열심히 사는 여인 그렇지만 평범한 한 여인의 몰락을 보여주고 있다. 그녀는 파티에서 만나 사랑에 빠진 남자(강도)와 사랑에 빠지고 그들은 카타리나의 집으로 간다. 그곳에서 경찰들이 남자를 잡으려 하자 그 남자를 도망치게 도와준 카타리나는 수사를 받게 된다. 수사는 진행중이었지만 일간지 '차이퉁'에 의해 그녀의 삶이 왜곡되어지기 시작한다. '차아퉁'은 그녀를 기사거리로 만들기 위해 그녀의 인권과 그녀가 하지도 않은 일을 가공해서 사람들에게 알린다. 카타리나는 그것을 참지 못하고 차아퉁의 기자를 총으로 쏴버린다. 이렇게 이야기는 끝난다.


진실과 사실 사이


'차이퉁'은 비단 삼류 일간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언론을 상징한다. 언론은 사실을 정확히 보도해야 한다. 이와 더불어 언론은 사실들을 통해 진실을 보여주야 한다. 여기서 사실과 진실의 차이를 조금 알아보고 가야 한다. 사실과 진실을 약간 혼동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은 '사물의 이치'이다. 가령, '카라티나 블룸이 차이퉁의 기자를 쏘았다.'라는 것은 사실이다. 진실은 '카타리나 불룸이 차이통의 기자를 쏘았는데 그 이유는 그 기자가 그녀의 인권을 무시하면서 까지 기사를 쓰려했기 때문이다.'라고 표현이 된다. 사실이 행위에 무게를 둔다면, 진실은 그 행위 속의 의도를 알리는 것이다. '차이퉁'은 카타리나의 삶을 왜곡시켜 버린다. 그녀가 비록 자신의 범죄자 남자를 도망치게(카타리나가 잘했다는 것은 아님)헸지만 아직 진행 중인 사건에 그녀를 마녀로 모는 것은 하나의 폭력이다. 요즘의 뉴스를 보다보면 다양한 뉴스기사들이 나오는데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기사라는 것이 정확히 사실에 근거해서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사실이라고 해서 진실이 된다는 것은 아니다. 뉴스 기사는 일종의 세상을 거울로 비추는 역할을 한다. 거울로 비춘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을 때 그것은 분명 현실이다. 하지만, 그 거울의 각도를 어떻게 하고, 거울로 어떤 부분을 비출지는 기자의 관점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문 기사들은 사실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몇 가지 사실을 보여주지 않음으로 진실을 가려버릴 수 있다.



직업으로서의 언론, 소명으로서의 언론


우리는 언론에 대해서 진실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사회적 의무를 중시한다. 맞는 소리이다. 하지만 언론이라는 매체는 두 가지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첫번째는 기업으로서의 언론이고 두번째는 진실을 밝혀야 하는 언론이다. 인터넷 기사를 보다보면 어그로를 끄는 기사들이 많은 것이다. 인터넷의 기사들은 조회수가 생명이기 때문에 기사를 자극적이고 우리에게 낚시 바늘을 던져주는 것이다. 이렇게 언론이 이상한 기사를 쓰기도 하는 이유는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이다. 차이퉁지는 카타리나를 최고의 특종으로 만들었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그녀를 점점 왜곡시켜 나간다. 그녀를 지하 단체의 조직원이라고 사상적인 프레임을 걸면서 독일의 사람들은 그녀를 욕하고 죽이려고 했다. 차이퉁지는 언론이 자신의 정체성 중 이익에만 집중한 언론을 비꼰 것이다. 세상에는 차이퉁지와 같은 언론도 있지만 정말로 목숨을 걸고 진실을 보도하는 언론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세상에 기자들이 없다면 세상은 미쳐 날뛸 것이다. 기자들이 출입하기 때문에 그래도 세상은 그들의 감시를 받는 것이다. 이번 JTBC가 종편이었지만 정부의 부패 스캔들을 들추어 냈고 그로 인해 많은 국민들이 알 권리를 되찾게 되었다. 만약에 JTBC와 그 기자들이 없었다면 얼마나 절망스러울지 생각을 해본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것이 알고 싶다>팀이나 JTBC가 정말로 목숨을 내놓고 취재를 한다고 생각한다. 이들의 이런 행동은 언론인의 양심이며 소명으로서 자신의 일을 해나가지 않는다면 이런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기자라는 직업은 진심으로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용기가 있기 때문에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카타리나의 저항은 과연 성공했을까?


'차이퉁'에게 모든 것을 잃은 카타리나에게는 더이상 잃을 것이 없었다. 사회와 법은 더이상 그녀를 지켜주지 않는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그녀에게 죄를 선고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고 있다. 이런 모습을 볼 때, 법이라는 것도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상황논리에 영향을 받는 것이다. 카타리나는 언론 때문에 그녀의 어머니도 잃고, 자신의 일상 생활을 빼앗겨 버렸다. 그녀는 이 세상에 혼자 서있을 뿐이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자신 혼자 저항을 하는 것이다. 그녀가 선택한 것은 바로 '차아퉁'의 기자를 총으로 쏘는 것이었다. 카타리나는 기자를 죽이는 것으로 성공을 했고 그와 더불어 자신이 그 기자를 총을 쐈다고 자수한다. 우리는 사회에 부조리에 대해서 저항을 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저항만으로 끝나는 것이 저항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저항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그 저항에 대한 대가를 저항한 내가 받아야 하는 것이다. 카타리나는 자신의 삶을 파멸시킨 언론에게 저항을 했다. 하지만, 그녀의 저항은 법을 어긴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자수를 한 것으로 살인해야 하지 말아야 하는 죄를 그녀 홀로 감당하게 되었다.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나름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이 대목은 마치 알베르트 카뮈의 <이방인>의 모습을 떠오르게 만든다.  하지만 언론은 그녀의 저항을 왜곡시켜 버린다. 어쩌면 <이방인>에서 뫼르소는 사형을 당할 때 신적인 존재의 모습으로 막을 내리지만 카타리나의 모습은 그 저항 또한 현실에 묻히는 슬픈 이야기로 끝이 난다. 비록, 결말은 꿈도 희망도 없어 보이지만 적어도 카타리나 자신은 언론과의 싸움에서 적어도 그녀 자신에게는 그녀의 명예를 되찾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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