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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성 Oct 25. 2016

자유와 광기를 선택한 남자, 돈키호테

<돈키호테 전편> 세르반테스를 읽고


오다 에이치로의 만화 <원피스>에서 돈키호테 도플라밍고라는 인물이 나온다. 이름에 나와 있듯이 그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에서 이름을 빌려왔다. 원피스으 돈키호테 도플라밍고는 해적왕이 되고 싶은 꿈이 있다. 사람들이 해적왕이라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말할지라고 그는 해적왕이 되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 가려고 한다.  아마,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뒤집어 놓은 것 같다. 하지만 이상을 쫓는다는 것에서는 공통점이 있을 것이다.


세르반테스가 살던 시기는 16세기 중반에서 17세기 초이다. 이 당시 스페인은 대제국이였고, 종교재판을 하면서 사람들을 통제했다. 이성중심의 사회로 들어서기 시작하는 것이다. 소설에 보면 돈키호테가 가끔은 광인처럼 보이는데 그가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것을 볼 그때 광인들은 자유로웠다. 하지만 <광기의 역사>에서 17세기에 광인들은 병원에 가두어지게 되었다. 만약에 반세기 후에 돈키호테가 나왔다면 그의 소설은 병원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여하튼, 17세기에 접어들게 되면 이성이 세상을 지배하게 된다. 세르반테스가 쓴 <돈키호테>는 이성이 세상을 지배하는 과정 속에 놓인 소설이다. 세르반테스는 독단적인 이성에 맞서 광인 돈키호테의 모험을 그렸다.



나는 내 이름을 짓는다. 내 이름은 돈키호테 데 라만차


그대의 영혼은 그대 자신의 몸속에 간직되어 세상에 누구 못지않게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고, 왕께서도 마음대로 세금을 내라 하실 수 있는 것처럼, 그대들도 집안에서는 주인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돈키호테 시공사 p10)


사실은 이 점 때문에 앞에서 언급했던 작가들이 그의 이름이 케사다가 아니라 키하다가 맞을 거라는 확신을 가진 것이었다. 어쨌든 훌륭한 아마디스는 단순히 아마디스라고 불리는 데 만족하지 않고, 조국의 위상을 드높이고자 조국의 이름을 자기 이름에 덧붙여 아마디스 데 가울라라 했던 것을 기억하면서, 돈키호테도 훌륭한 기사처럼 그의 이름에 고향의 이름을 덧 붙여 돈키혼테 데 라만차라고 결정했던 것이다. (돈키호테 시공사 p43)


서문을 보면 세르반테스는 자신의 서문을 쓰려고 고민을 한다. 그런데 어떻게 쓸지 고민을 하자 그의 친구가 들어온다. 사실 나는 세르반테스가 친구라고 가장하여 자신의 내면을 두 부분으로 나눈 것으로 본다. 글을 쓰는 세르반테스는 기존의 것을 답습하면서 쓰려고 하지만 또 다른 면의 세르반테스는 자유의지를 강조하며 자신이 쓰고 싶은 글을 쓰라고 말한다. 그 당시 스페인의 경우 영국에게 패배를 하고 사회체제가 불안했었다. 사회 체제가 불안했기 때문에 기독교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체제와 다르면 모두 불태워 버리는 시대였다. 이 시대에서는 자유의지보다는 삶의 순응을 하면서 살아야 했는데, 세르반테스도 삶의 순응을 할까, 아니면 자유의지를 선택할까 고민을 했던 것 같다. 그의 결정은 돈케호테가 자신의 이름을 짓는 것부터 시작이 된다. 이 소설을 쓰는 저자는 돈키호테의 본명을 정확히 표기하지 않는다. 기사 소설 덕후였던 60대 할아버지가 책을 읽고 이성을 잃어서 그는 모험을 떠나기로 마음 먹는다. 그는 자신의 갑옷과 투구를 만들고 자신의 말에 로시난테라 이름을 붙인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돈키호테 데 라만차라고 이름을 붙인다. 돈키호테가 자신의 기존의 이름을 쓴다는 것은 일종에 사회체제 속을 답습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이름을 짓고 자신의 세상을 만들 때 그는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주막집에 들러서 주막집 주인에게 자신을 기사가 되는 의식을 치르고 그의 모험을 떠난다.



돈키호테의 이상의 목표 바로 둘시네아 델 토보소


사람들 말로는 그의 마을 근처에 아주 아리따운 처녀 농부가 있었으며, 그가 한때 열렬히 사랑했다고 한다. 그녀는 그의 존재조차 몰랐을 뿐 아니라 그를 마음에 두어본 일도 없었다지만 말이다. 그녀의 이름은 알돈사 로렌소였다. 돈히호테는 그녀를 마음속 연인으로 삼아도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자신의 이름과 어울릴 만한, 그리고 공주나 귀부인에게 잘 맞을 이름을 찾아 고심하던 끝에 마침내 둘시네아 델 토보사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녀사 토보소 출신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이름이 자기 자신이나 모든 것들에 붙여진 이름처럼 움악적이고 신비롭고 의미심장하게 느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돈키호테 시공사 p43-44)


<돈키호테>를 보면 둘시네아 델 토보소라는 여자가 미지의 여자이다. 소설을 계속 읽다보면 그녀를 생각하는 돈키호테가 많이 나오지만 정작 그녀의 실체는 나오지 않는다. 나중에 돈키호테가 산초 판사에게 그녀에게 편지를 전해주라고 여행을 떠나 보내지만 산초 판사는 그녀를 만나지 못하게 된다. 사실 소설 속의 인물들의 묘사에 따르면 그녀는 시골 농부이고 야리야리한 공주가 아니라 건장하고 건강미 넘치는 여성이다. 약간 살집도 있는 것처럼 묘사된다. 하지만 그녀는 소설 속에서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이처럼, 소설에서 그녀는 미지의 연인이다. 그리고 그녀는 돈키호테가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그녀 때문이다. 이처럼, 둘시네아 델 토보소는 돈키호테의 이상이며 꿈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를 현실에서 만나는 순간 돈키호테의 꿈과 이상은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이상이 현실이 되는 순간 그 꿈은 현실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더이상 이상이 아니게 된다. 그리하여 세르반테스는 그녀가 존재한다고만 이야기하고 소설 속에서는 절대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녀는 돈키호테가 여행을 하는 심장 그 자체이다.



돈호테와 산초 판사와의 만남


이즈음 돈키호테는 가진 것은 조금 있지만 -그래도 가난을 면치 못하는 정도였다- 머리는 약간 아둔한 이웃집 농부를 구슬리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하고 얼마나 숱한 약속을 했는지, 결국 그 가나나한 농부는 돈키호테의 종자가 되어 함께 길을 떠나기로 했다. 이런저런 약속 덕분에 산초 판사라 불리는 이 농부는 처자식들을 남겨두고 돈키호테의 종자가 되었던 것이다. 돈키호테가 늘어놓은 많은 이야기들 중에서도 특히 자신과 함께 길을 떠난다면 모험을 할 수 있을 것이고, 언젠가는 섬도 손에 넣을 텐데 그때는 그 섬의 영주로 삼겠노라는 약속에 넘어가버린 것이었다 (돈키호테 시공사 p95)


돈키호테는 주막에서 기사 칭호를 받고 홀로 여행길을 떠난다. 그는 모험에서 처음 만난 안드레스라는 소년이었는데 농부가 그를 때리면서 열정페이를 요구했던 것이다. 그것을 본 돈키호테는 둘의 관계를 합리적으로 설득시켜서 농부가 소년에게 임금을 주라고 한다. 농부는 알겠다고 하며 돈키호테를 보내며 안드레스라는 소년을 두들겨 팬다. 그 다음 그는 톨레도 상인을 만나는데 그들에게 자신의 연인 둘시네아 데 토로소가 아름답다고 맹세하라고 억지를 부린다. 상인들이 거부하자 그는 창과 방패를 들고 그들에게 달려들지만 로시난테가 넘어져서 그는 말에서 굴러 떨어진다. 상인의 무리 중 노새몰이꾼은 화가 나서 돈키호테를 두들겨 팬다. 정신을 잃은 돈키호테는 마을 농부에 이끌려 마을로 돌아간다. 그렇게 첫번째 모험은 끝이 난다. 그 마을에서 돈키호테의 친구인 이발사와 신부는 돈키호테의 여조카와 가정부를 대동해서 돈키호테가 읽은 기사소설들을 불태운다. 이 장면을 통해서 종교재판의 비합리성을 보여주는 것인데 사회체제에 부합하지 못하는 것들은 모두가 이단이 되는 것이다. 이 장면을 통해서 스페인에서 이루어지던 마녀재판이나 종교재판이 얼마나 비합리적인 것인가를 보여준다. 돈키호테는 두들겨 맞아서 그의 집에서 휴식을 취한다.


두번째 모험을 떠나기 전에 돈키호테는 산초 판사라는 농부를 꼬득인다. 그에게 섬의 영주를 시켜준다고 하자 산초 판사는 그의 말을 믿어 모험에 동참하게 된다. 그런데 산초 판사가 자신의 가족도 버리면서 모험을 떠나는 모습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모습이 연상이 된다. 예수님이 떠나자고 하자 베드로는 당시 어부였고 처자식이 있었지만 무작정 예수의 제자가 되어 길을 떠난다. 그런데 여기서 떠난 동기도 비슷하다. 산초 판사는 돈키호테가 멋진 기사가 되고 지도자가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의 제자들도 예수님을 따를 때, 순수한 목적으로 따른 것이 아니었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 당시 로마를 무너트리고 정치적 메시아가 되기를 빈 것이다. 그리하여 베드로와 요한의 어머니 또한 나중에 예수님이 메시아가 되면 자신의 아들들을 양 옆에 앉혀 달라고 간청한다. 근데 그 두 자리는 죽는 자리였다. 재밌게도 예수의 제자들은 모두 순교를 당하게 되고 요한은 고문을 받고 유배당한다.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의 뜻을 알게 되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고 성령을 받으며 예수의 길이 바로 복음을 전하고 고난의 길을 걷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아직 후편을 읽지 못해서 산초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산초가 떠나는 것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떠나는 것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은 예수의 제자들과 닮았다.



돈키호테 진격의 풍차를 만나다


"운명이 우리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길로 인도하는구나. 저기를 보아라. 산초 판사야. 서른 명이 좀 넘는 거인들이 있지 않는냐. 나는 저 놈들과 싸워 모두 없앨 생각이다. 전리품으로 슬슬 재물도 얻을 것 같구나. 이것은 선한 싸움이다. 이 땅에서 악의 씨를 뽑아버리는 것은 하나님을 극진히 섬기는 일이기도 하다.'

"거인이라니요?"

"저쪽에 보이는 팔이 긴 놈들 말이다. 어떤 놈들은 팔길이가 2레구아나 되기도 하지."

"저, 주인님. 저기 보이는 것은 거인이 아니라 풍차인데요. 팔처럼 보이는 건 날개고요. 바람의 힘으로 돌아가면서 풍차의 맷들을 움직이게 만들지요." (돈키호테 시공사 p99-100)


정말 이 부분이 골이 때린다. 왜냐하면 이 부분이 돈키호테가 세상을 바라보는 것을 결정내리기 때문이다. 돈키호테는 풍차를 보고 거인이라고 하고 산초 판사는 풍차라고 한다. 이것은 인간의 감각기관이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대한 의문을 던지는 것이다. 이 당시 르네 데카르트도 세르반테스와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사람인데 그는 자신이 바라보는 것이 무엇이 진리인지에 대한 걱정을 했었다. 인간의 감각이라는 것은 주관적이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면서 세상을 어떻게 온전히 바라볼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최근에 큰 인기를 누렸던 포켓몬go가 있다. 포켓몬go라는 안경을 낀 사람이 세상을 바라 볼 때 우리가 보이는 모든 것들이 같아 보이지만 그 안경을 낀 사람은 포켓몬들이 길거리에서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안경을 끼지 않으면 포켓몬은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돈키호테와 산초가 보는 세상은 이렇게 다른 것이다. 특히나, 당시의 스페인 사람들은 기독교 윤리에 빠져서 모든 것을 기독교적으로 바라보고 동시에 이성이 대두되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보았다. 당대 사람들도 기독교와 이성이라는 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본 것이다. 이것은 돈키호테가 기사 소설에 빠져서 기사에 대한 상상의 부분이 현실과 합쳐지면서 광인이 된 것인데,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나 그 당시 사람들이나 모두가 광인이라고 꼬집고 있는 것이다. 여하튼, 돈키호테는 풍차로 돌진해서 풍차의 날개에 맞아서 또 패배를 한다.


피에라브라스의 향유로 불멸을 꿈꾸다.


"그 향유는 말이다. 내가 머릿속에서 제조법을 잘 기억하고 있는데 그 약만 있으면 죽음도 두려워할 필요 없고, 상처가 나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할 필요가 없지. (중략)" (돈키호테 시공사 p123)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는  성 베네딕트 교단의 수도사들을 만난다. 돈키호테는 그들이 마차를 타고 가면서 한 여성을 납치한다고 상상하고 또 돌격을 한다. 말을 몰던 바스키야인은 그가 광인인 것을 알고 그와 싸운다. 그런데 돈키호테는 또 넘어진다. 그러나 다시 몸을 일으켜 바스키야인를 두들겨 패서 그를 기절시킨다. 하지만 돈키호테는 또 부상을 입는다. 그는 산초 판사와 피에라브라스의 향유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데 그 약은 불사의 약이다. 사실, 불사의 약이라면 동양에서는 긍정적으로 여겨진다. 진시황은 영원히 살고 싶어했고, 동양 고전에서는 영원히 사는 편안해 보이는 신선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구인들의 입장에서 오래 산다는 것은 신에게 도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양에서 뱀파이어나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크리처, 도리언 그레이, 드라큘라 백작, 좀비들은 모두 부정적인 이미지를 보여준다. 서구인들의 입장에서 영원성을 추구한다는 것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유한자의 입장에서 신이 되고 싶다는 꿈이다. 특히나, 당시 스페인은 종교재판을 할 정도로 독실한 카톨릭 국가였다. 돈키호테같이 영원히 살겠다고 외치는 사람은 신의 자리를 넘보는 이단이였다. 그렇기 때문에 세르반테스가 이런 시대에 돈키호테의 입을 빌려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매우 대담한 행위였다.



마르셀라의 연설 : 여성은 자유로운 존재이다.


"그리소스토모가 받은 고통과  그의 죽음을 모두 나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 얼마나 이치에 맞지 않는디 말씀드리기 위해 온 것입니다. (중략) 그렇지만 아름답기에 사랑받는 사람이 자신의 사랑받는다는 이유로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듭니다. (중략) 제가 어디서 읽은 적이 있는데, 진정한 사랑은 깨짖 않으며 스스로의 마음에서 우러나야지 강요해서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중략) 이런 것이 없는 육체는 비록 아름답더라도 아름답게 보일 수 없는 법입니다. 만일 정절이라는 것이 육체와 영혼을 좀더 아름답게 가꾸어주는 미덕이라면 왜 아름다움으로 인해 사랑받는 여인이 그저 재미로, 그리고 강압적으로 달려드는 남자의 의도에 의해 정절을 잃어야만 하는 겁니까? 저는 자유롭게 태어났고, 또 자유롭게 살아가기 위해 초원에서의 고독을 선택한 것입니다" (돈키호테 시공사 p168-169)


돈키호테와 산초는 또 모험을 하다가 산양치기들을 만난다. 그들은 추모를 하고 있었는데 자신의 친구가 한 여성을 사랑하다가 가슴앓이를 하다가 자살을 했다는 것이다. 그녀의 이름은 마르셀라였는데  그녀는 자유롭고 싶어서 산에서 양을 쳤었다. 그 마을의 남자들은 그녀의 미모에 반해 그녀를 따라 산양치기가 되었다. 그리소스토모는 그녀가 온화하고 아름다워 좋아했지만 그녀는 남자들을 거절하는 탓에 혼자 속앓이를 하다가 자살을 한 것이다. 그러면서 마을 사람들은 마르셀라를 욕했다. 돈키호테와 산초는 그리소스토모의 장례식에 참여했는데, 마르셀라가 등장해서 자신에 대한 연설을 했다. 그녀의 연설은 여성이라는 존재가 자기 결정권을 가질 수 있고 하나의 인격체라는 연설을 한다. 사실 이 생각은 매우 파격적이었다. 지금도 여성들이 많이 차별을 받고 있는데 세르반테스가 이런 연설을 생각했던 것을 보면 그는 억압적인 사회에 대해서 많은 인식을 했던 것 같다. 돈키호네는 그녀의 말을 듣고 그녀에게 감동하고 그녀를 지키겠다고 맹세를 한다. 그는 장례식을 끝나고 산초와 함께 마르셀라를 찾아 숲속으로 들어가지만 마르셀라를 찾을 수는 없었다.


성으로 보이는 주막으로 들어간다.


돈키호테는 모험을 또 떠나고 양구아스인들과 또 시비가 붙고 로시난테, 산초, 돈키호테 모두가 두들겨 맞는다. 그리하고 주막으로 들어간다. 이 주막은 소설을 보다 보면 정말 중요한 곳이다. 주막의 주인과 부인 그리고 그들의 딸 마리토르네스가 주막을 운영하고 있었다. 거기서 돈키호테는 마리토르네스를 공주로 상상하고 그녀가 자신을 치료해주었다고 하며 그녀에게 약간의 연심을 품는다. 그것을 그녀의 남자친구가 보고 있었고 싸움이 벌어진다. 돈키호테와 산초 마리토르네스 그리고 그녀의 남자 친구는 서로 부등켜 싸우고 그녀의 아버지가 깨어나서 주막은 아수라장이 된다. 그러다 종교경찰이 와서 그 싸움은 끝이 난다. 대중 문제가 해결되고 산초와 돈키호테가 떠나려고 하자 주인은 돈을 달라고 한다. 하지만 돈이 없다고 돈키호테는 튀어 버리고 산초는 잡혀서 이불에 둘둘 쌓여서 주막집 사람들이 그를 공처럼 던지고 괴롭힘을 당한다. 그런데 돈키호테는 안 도와준다. 여기서 산초는 트라우마가 걸린다. 주막에서 나오고 그는 양떼를 군사 전쟁으로 생각하고 들어가다 양치기에게 돌팔매질을 당하고 이빨이 나가는 등 그의 우스꽝스러운 모험은 계속 이어진다.



맘브리노 투구인가, 놋대야인가?


"내 말이 뭐가 잘못됐다는 거냐, 이 배은망덕한 놈아? 자, 봐라. 저기 얼룩말을 타고 황금 투구를 머리에 쓴 채 우리 쪽으로 오고 있는 기사가 보이지 않느냐?"

"저 멀리 어렴풋이 보이는 것은 제 당나귀처럼 황갈색 당나귀를 타고, 머리에는 뭔지는 모르지만 번쩍거리는 걸 얹고 오는 웬 남자일 뿐입니다." (돈키호테 시공사 p251)


돈키호테와 산초는 비오는 날, 한 사람을 보는데 그 이발사는 비가 와서 놋대야를 쓰고 길을 가고 있었다. 돈키호테는 놋대야를 보고 그것이 맘브리노의 투구라고 생각하고 그를 공격하고 그 놋대야를 강탈한다. 이 사건이 있은 직후 산초는 자신의 모험에 대해서 한탄을 한다. 그의 말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그냥 세상에 타협하면서 편안하게 살면 될 것을 왜 이렇게 고생을 하냐는 것이다. 그는 편력 기사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모험을 지나가고 국왕을 영접하고 공주와 결혼해서 명예롭게 사는 것이 기사의 길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돈키호테와 산초의 갈등이 일어나게 된다. 저번 풍차 사건에서 산초는 그것이 끝까지 거인이 아니라 풍차라고 얘기했었다. 그 갈등이 여기서 불거진 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꿈과 현실 가운데서 갈등을 한다. 산초가 말하는 삶은 그 당시 기독교인들이 가지고 잇던 신념이었다. 사회에서 자신의 삶이 신이 준 것이라고 믿으며 순응하는 삶 말이다. 그에 대해 돈키호테는 광인의 말로 이야기한다. 그는 기사의 모험을 예로 들면서 이야기하지만 그 안에는 삶이라는 것이 꿈을 꾸고 자유롭게 그 꿈을 따라가며 사는 것이라고 말이다. 신의 뜻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인생을 만들어 가라는 것이다. 그는 삶이란 선택의 역사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산초 판사는 과거 풍차 사건 때와는 달리 돈키호테의 말에 감명을 받으며 돈키호테를 진심으로 따르게 된다.


범죄자들에게 자유를 설파한 돈키호테


여러분들의 의지에 어긋난다는 것을 말이오. 그저 어떤이는 고문 속에서 용기가 부족했고, 또 어떤 이는 돈이 부족했으며 다른 사람의 호의가 좀 부족했던 경우도 있었소. 그리고 종국에는 재판관의 잘못된 판단이 여러분에게 파멸을 초래했으며 여러분들이 지니고 있었던 정의를 이끌어내지는 못했소. (돈키호테 시공사 p276)


돈키호테와 산초는 또 모험을 떠나다가 노역을 하러가는 죄수들을 만난다. 돈키호테의 연설이 여기서 완전 정상인인데 거의 정확하게 사태를 파악하고 있다. 그는 그 당시 재판이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법 또한 상황 논리에 빠져서 판결이 내려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법의 문제가 아니라 법을 판단하는 사람들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알베르트 카뮈의 <이방인>에서 뫼르소는 자신이 왜 아랍인을 총으로 쏘았는지에 대해서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뫼르소가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있었던 일, 그 다음날 해수욕을 즐겼다는 일 등등을 증거로 들이대면서 뫼르소를 사형장으로 보내는 모습이 지금 돈키호테가 사는 세상에서 겪는 것과 같은 장면으로 보인다. 돈키호테가 이런 연설을 하고 그는 또 돌격해서 노예들을 풀어준다. 그러면서 자신의 연인 둘시네아 텔 토보소에게 감사의 맹세를 하자, 갑자기 노예들의 태도가 바뀐다. 그들은 돌을 던지면서 자신들을 구해주었던 돈키호테를 몰아내 버린다.



시에라 모레나 산맥에서 광인 또다른 광인을 만난다.


돈키호테를 '슬픈 얼굴의 기사'라 부른다면, '불행한 얼굴의 누더기 기사'라 부를 만한 그 젊은이는 돈키호테가 자신을 포옹하도록 내버려두었다가 잠시 후 그를 좀 떨어뜨려놓고 돈키호테의 두 어깨에 손을 얹고 아는 사람인지 확인하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중략) 결국 포옹 끝에 먼저 말을 꺼낸 이는 누더기 기사였고, 그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p296)


돈키호테와 산초는 정신이 나간 카르데니오를 만난다. 그를 만나러 가는 길에 당나귀는 죽어 있고 절규하는 편지가 있으면서 뭔가 무서운 느낌을 준다. 그곳에 목동들은 한 남자가 미쳐 날뛰면서 가끔 자신들의 음식을 뺏어가기도 하며 미치광이가 되었다고 한다. 카르데니오와 돈키호테가 서로를 응시하는 장면이 있는데 광인은 광인을 인정한다는 것 같았다. 돈키호테는 왜 카르네니오가 이상한 짓을 하고 다니냐고 물었다. 여기서 또 액자식 구성의 이야기가 들어가는데 카르데니오는 영주의 자제였다. 그는 사랑하는 여자 루신다가 있었고 그녀와 결혼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결혼이 밀려서 잠시 자신의 친구 돈페르난도의 성에 가게 된다. 그 당시 돈페르난도는 농부의 딸을 사랑한다면 그녀와 관계를 맺고 그녀를 정복했다고 의기양양하면서 그녀를 버린다. 그리고 돈페르난도는 카르데니오와 카르데니오의 성으로 간다. 그곳에서 그의 약혼녀 루신다를 보고 돈페르난도는 사랑에 빠지게 된다. 이야기를 하던 중 카르데니오는 루신다가 카르데니오에게 기사 소설을 선물하려는 장면을 설명할 때, 돈키호테가 끼어들어 기사 소설이 문제라고 하며 뻘 소리를 한다. 그 이야기에 화가 난 카르데니오는 돈키호테를 패버린다. 그리고 떠난다. 아까, 두 사람이 마치 거울을 보듯이 서로를 동정했는데 그것은 광기 때문이었다. 카르데니오는 아마 돈페르난도가 자신의 약혼자를 취했다는 그 분노 때문에 광인이 되었다. 평소에는 괜찮지만 그 생각만 하면 그는 광인이 된다. 그런데 여기서 돈키호테도 그렇다. 그는 기사도 이야기만 하면 미쳐버린다. 카르데니오에게 광기를 불러 일으키는 것은 루신다의 부재이다. 즉, 루신다가 돌아오면 그의 광기는 치유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돈키호테의 광기는 본질이 다르다. 그는 지금의 세상을 거부한 것이다. 즉 세상이 바뀌지 않으면 돈키호테의 광기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두 광인은 이별은 한다.



산초는 다시 주막으로 돌아가고 그곳에서 돈키호테의 친구 이발사와 신부를 만난다. 그리고 어떤 여자를 만다.


기사님(돈페르난도)의 혈통이 아무리 고귀하다 하더라도 저의 혈통에 조금이라도 수모를 가한다든지 천대할 수는 없는 것이며, 그래서도 안 됩니다. 평민이자 농민인 저(도로테아)도 자신을 소중히 여긴다는 점에서 귀족이며 기사님인 당신과 같습니다. (p379)


돈키호테는 숲 속에서 갑자기 자신의 연인이 보고 싶었고 자신의 조카에게 안부를 전하기 위해서 편지를 써서 산초 판사에게 자기 대신 자신의 고향에 편지를 전달하라고 한다. 산초 판사는 길을 떠나고 돈키호테는 홀로 그곳에 남는다. 여기서부터 이야기가 돈키호테 친구 이발사와 신부의 시점으로 간다. 이발사와 신부는 산초 판사를 만난다. 원래 신부와 이발사는 광인인 돈키호테를 집으로 대려오려고 여행을 떠난 것이었다. 그들은 산초 판사가 가지고 있던 편지를 보고 그것을 자신들이 대신 말로 전해준다고 하고 편지를 불태우고 돈키호테를 찾으러 간다. 그러던 중 신부와 이발사는 노랫소리를 듣고 그곳으로 따라가자 카르테니오가 있었다. 신부와 이발사는 카르데니오의 이야기를 듣는다. 아까 돈키호테에게 했던 이야기 다음 부터 이야기가 나온다. 돈페르난도는 카르데니오를 자신의 형의 영지에 보내서 몇 일을 묶어 둔다. 그 사이에 돈페르난도는 루신다의 주위사람을 매수하고 그의 부모에게 결혼을 약속 받는다. 루신다는 카르데니오게 편지를 보내 자신은 결혼한다는 내용을 전한다. 자신의 결혼식에 참여하면 그 앞에서 자신이 자살을 하겠다고 했다. 카르데니오는 결혼식에 참석하는데 그녀가 죽지 않고 그냥 기절하는 모습을 보고 그녀에게 배신감을 느낀다. 그리고 당나귀를 타고 산 속으로 들어가서 미치광이로 살아간다. 그 이야기를 끝마치자 한 여성이 등장한다. 그녀의 이름은 도로테아였다. 그녀는 돈페르난도가 버린 여자였다. 도로테아는 돈페르난도의 사랑과 신분상승의 욕구 사이에서 고민을 하다가 자신의 정절을 깨버린다. 그리고 돈페르난도는 도망가 버렸다. 도로테라는 집을 떠나 돈페르난도를 찾아 다니는데 그녀는 사회 속에서 여자들이 얼마나 약자인지를 보여준다. 그녀와 함께하던 하인이나 신세를 지고 있던 집의 주인도 그녀를 성적 노리개로 생각했던 것이다. 이렇게 사랑에 버림받은 카르데니오와 도로테아가 만나게 되었다. 여기서 신부와 이발사는 자신들이 왜 여기에 왔는지를 이야기하고 도로테아와 카르데니오도 이 계획에 참여하게 된다.


돈키호테 구조단, 돈키호테를 다시 주막으로 대려온다.


도로테아는 자신이 공주라고 뻥을 쳐서 돈키호테에게 사건을 의뢰해서 그를 유인하겠다고 한다. 당연히 돈키호테는 그녀가 공주이고 기사도에 따라 그녀의 청을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돈키호테, 산초, 도로테아, 신부, 이발사, 카르데니오는 산초가 모욕을 당했던 주막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곳에서 돈키호테는 잠이 들고 주막은 이야기의 장으로 변하게 된다. 그곳에서 주인은 <무모한 호기심에 관하여>라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안셀모와 로타리오이다. 안셀모는 자신의 아내가 자신을 사랑하는지 궁금해서 자신의 친구 로타리오에게 그녀를 꼬셔보라고 한다. 로타리오는 이것을 거부하지만 마지막에는 승낙을 한다. 하지만 장난이 오해를 불러 일으켜서 아내는 진짜 로타리오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안셀모는 죽음을 맞이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던 중 돈페르난도와 루신다가 주막에 들어온다. 드디어, 카르데니오, 도로테아, 돈페르난도, 루신다가 만나게 된 것이다. 처음에 서로 싸우게 되지만 루신다는 결혼식장에서 돈페르난도와 결혼을 못하겠다고 뛰쳐 나오고 카르데니오를 찾아 떠난다. 돈페르난도는 분노하여 그녀를 뒤쫓는다. 모든 오해가 풀리고 카르데니오와 루신다는 부부가 되고, 돈페르난도와 도로테아도 부부가 된다. 주막에서 이들은 모든 문제를 풀고 화해를 하게 된다. 밤에 돈키호테가 또 미쳐 날뛰어 난동을 부리기도 하지만 모두가 즐거워 한다. 그러면서 포로와 포로와 함께 온 외국인 여인도 들어오고 그곳에서 포로의 남동생 판사와 그의 딸도 주막에 합류해서 이산가족 상봉을 한다. 그러면서 주막에는 돈루이스라는 청년이 오는데 그는 판사의 딸을 사랑해서 그를 쫓아온 것이다. 이렇게 주막은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게 된다. 또한 그 주막에는 놋대야를 강탈당한 이발사도 합류하게 된다.


주막이라는 곳은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모두가 각자의 이야기를 가지고 오며 같이 즐거운 대화를 나누며 떠날 사람은 떠나고 남아 있을 사람은 남아있는 곳이다. 주막은 일종에 작은 사회이다. 모두가 삶의 문제를 가지고 있고 이곳에 모여서 화해를 하는 곳이기도 하다. 돈키호테 때문에 모였던 정말스러웠던 사람들은 돈키호테와 함께 지내며 즐거워 하며 삶의 의미를 찾아나서는 곳이다. 돈키호테가 의도한 것 같지는 않지만 모두가 사회 체제의 압제 속에서 그것을 못 견디고 모두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자신의 선택을 한다. 이것은 아마 세리반테스가 보여주고 싶었던 이상향이었던 것 같다. 신분을 뛰어넘고, 기독교 사회와 이성을 강조하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감옥에 갇힌 삶을 산다. 하지만 이들은 이곳에서 해방감을 느끼고 자유롭게 이야기를 한다. 돈루이스를 잡으려는 돈루이스의 아버지의 하인들과 싸움이 일어나고 이때 종교 경찰들이 나타난다. 또 이때 주막 주인은 돈을 안내고 도망가려는 손님들과 싸움이 벌어져서 주막은 싸움터가 되어 버린다. 어떻게 어떻게 하여 사건은 해결이 되고 주막을 떠나게 되는데 여기서 사람들은 모두 연락을 하자고 인사를 하며 떠난다. 신부와 이발사는 돈키호테를 소 달구지에 잡아다가 그를 고향으로 대리고 간다.


교회법 연구원과의 마지막 결투


모든 종류의 사람들이 한결같은 기쁨으로 읽고 칭찬하는 책들이 어찌 거짓일 수 있겠소? (중략)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편력기사가 되고부터 용감하고 공손하고 민첨하고 예의바르고 너그럽고 정중하고 대담하고 정답고 인내심이 있으며, 고생도 속박도 마법에도 굴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소, 비록 얼마 전부터 광인으로 취급받아 우리에 갇혀 있기는 하지만, 내 생각에 용기를 내어 하늘이 돕고 운명이 나를 저버리지 않는다면, 나는 근시일 내에 어느 왕국의 왕이 되어 그곳에서 이 가슴 속에 숨겨진 감사함과 관대함을 펼치게 될 거시오. 귀공이여, 내 맹세하건대, 가난한 자는 더할 나위 없는 극도의 성의를 간직하고 있더라도, 누구에게도 그 관대함의 미덕을 보여줄 자격이 없소. 그러니 단지 마음속으로만 생각하는 감사는, 싱천 없는 신념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죽은 것과 같단 말이오. 따라서 행운의 여신이 나로 하여금 황제가 될 어떤 기회를 하루 속히 배풀어주어 내 친구들, 특히 나의 종자이자 이 세상에서 가장 착한 사나이인 이 측은한 산촌 판사에게 선을 배풀고자 하는 내 심중을 보여줄 수 있기를 바라오. 그리고 오래전 산초에게 약속한 바 있는 백작 영토를 하사하기를 바라오. 그가 자신의 영지를 다스릴 능력이 없는건 아닌가 하는 우려스러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요." (돈키호테 시공사 p688-689)


소 달구지에 끌려가던 돈키호테와 일행은 길을 가다 교회법 연구원을 만나 잠시 동행하게 된다. 교회법 연구원은 <돈키호테 전권>에서 마지막 상대이다. 그는 돈키호테가 꿈을 가지고 나가는데 마지막으로 부딛혀여여야 하는 대상이다. 그는 세상을 의미한다. 돈키호테는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며 이상적인 이야기를 한다. 세상은 자신이 선택하고 그 선택이 모여서 자신의 존재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교회법 연구원은 돈케호테가 말한 것은 아무 것도 아니며 사회가 가라는 길을 가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교회법 연구원과 같은 생각을 많이 한다. 특히나, 우리는 어린시절부터 사회가 말하는데로 학원을 다니고 경쟁을 하고 특목고를 가려고 노력하고, 명문대를 가려고 노력하고, 취업을 하려고 치열하게 싸우며, 취업을 하고 나도 그 안에서 인간관계에 괴로움을 느낀다. 우리가 그 길의 종착점에 갔을 때 우리는 행복한가? 우리는 사회가 가라는 길을 걸었지만 그 길 앞에서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한다. '왜 내가 여기까지 왔지'라고 말이다. 돈키호테는 우리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자유롭게 결정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말이다. 이 말에 변화된 것은 바로 산초였다. 그는 처음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돈키호테를 따랐지만 그는 자유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했던 것 같다. 그의 입에서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말이 나오다니 이제 그는 돈키호테의 유산믈 물려받은 남자였다.



성모상을 향해 돌진하는 광기의 기사


사랑스런 둘시네아여, 그대가 없어서 이런 극심한 불행에 놓인 거요. 산초야, 나를 좀 일으켜다오. 그리고 마법에 걸린 짐수레에 나를 태워다오. 아깨가 부러져 로시난테의 안장을 조일 수 없구나. (돈키호테 시공사 p708)


길을 가다가 산양치기를 만나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사모하던 여인이 있었는데 그 여인은 너무 아름다워서 모두를 거절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사기꾼 군인이 나타나서 그녀를 사랑에 빠지게 만들고 그녀와 사랑의 도피를 하자고 한다. 그러나 그 사기꾼 군인은 그녀의 금품을 모두 훔치고 아마 그녀의 순결까지 흠쳤던 것 같다. 그 이후 그녀는 마을로 돌아왔고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를 수도원에 가둔다. 그러자 마을의 청년들은 모두 상양치기가 되어 광기에 휩쌓인다고 하였다. 갑자기 분노한 돈키호테는 산양치기와 몸싸움을 버리다 지쳐서 휴전을 명한다. 돈키호테가 분노한 것은 둘시네아로 표현되는 꿈이 없는 것에 한탄 때문일 것이다. 청년들은 마을의 여자가 없어졌다고 자신의 삶을 포기한 모습에서 분노를 했던 것이다.

그때 길가에 고행자들의 무리가 지나가며 성모마리아 상을 매고 가고 있었다. 돈키호테는 성모마리아상을 보고 고행자들이 한 여인을 납치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고행자들에게 달려들지만 두들겨 맞고 기절하고 마을에 끌려가서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렇게 전편은 끝나게 된다. 돈키호테가 마지막에 성모마리아상을 구출하려고 했던 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기심에 따라 종교까지 이용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마녀재판이 일어나고, 종교재판이 일어나서 사회의 약자들을 희생양으로 삼고 그들을 억압하는 것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은 것이다. 돈키호테는 그런 사람들에게 저항을 한 것이다. 그러나 돈키호테의 저항은 다시 현실의 벽에 무너져 패배하고 만다.



돈키호테 데 라만차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꿈을 꾼다. 하지만 우리는 그 꿈이 현실이라는 벽 속에서 무너져서 포기한다. 하지만 돈키호테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희망이다. 꿈을 꾸라는 것이다. 아무리 변하지 않을 사회에 부딛히고 저항하라는 것이다. 자신이 선택한 삶을 선택하고, 그 벽에 부딛혀 무너지더라도 다시 일어나서 전진하라는 것이다. 돈키호테의 삶은 대부분 두들겨 맞는 삶이었다. 그래도 그는 일어났다. 그의 이상을 위해서 말이다. 그는 자신이 꿈꾸는 세상을 위해 달려갔던 인물이다.


<돈키호테 후편>은 약간 시간이 걸려서 업로드할 것 같습니다. 전편은 700페이지인데 후편 900페이지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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