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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성 Jan 29. 2016

<쿵푸 팬더3> 내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엇인가?

과거부터 지금까지 나는 찌질하지만 왜 나는 내 자신을 사랑해야하는가?


<쿵푸 판다 3>는 전작들에 비해 영상미적으로 발전했으며, 2시간 내내 너무 웃어서 시간이 가는 줄을 몰랐다. 당연히, 스토리란, 적이 나타나서 그 적을 이긴다는 뻔한 스토리지만, 그 안에는 정말 생각할 것이 많아 보였다.


사회 속에서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주인공 포는 용의 전사가 되어 두 번이나 마을을 지켜냈다. 그는 용의 전사로 영웅이 되었다. 영화 초반에 그의 스승 시푸는 포에게 '용의 전사란 무엇이냐'에 대해 답을 하지 못한다. 이를 직접적으로 바꾸면, 너란 존재는 어떤 사람이냐는 질문에 봉창하게 된다. 이런 질문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은 방황을 하게 된다. 이런 것이 어떤 사람은 사춘기 때 오고 중년이 되서 오기도 하는 질문이다. 하지만,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20대부터 시작되는 것이 대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대학교 저학년 시절에는 내가 누군이지에 대해서 궁금했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 라는 질문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했지만, 쉽게 답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내가 어떤 사람이야 라고 생각을 하면 그 어떤 사람에 대한 이상과 나의 현실의 모습 사이에 괴리가 있어서 방황을 했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고민을 그만 두고 책을 많이 읽었던 것 같다. 보들레르의 시를 읽었던 날은 내가 보들레르가 되어서 살았고, 카프카를 읽었던 날에는 카프카가 되어서 살았으며, 어느 날은 이성의 힘으로 세상을 설명을 하려고 하였고, 어느 날은 실존주의자가 되기도 했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용의 전사 포의 정체성의 고민은 나의 어린 시절의 모습과 비슷했던 것 같다.



나는 판다이지만 판다가 아니다.


포는 마을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만나게 되고 판다들이 사는 곳으로 찾아가게 된다. 하지만, 포와 판다들 사이에 상당한 괴리가 있었다. 집단 생활을 하던, 판다들은 그들의 관습과 문화와 행동 양식이 있었다. 하지만 20년 동안 떨어져 있었던 포는 그들의 문화를 따라가려고 하지만 20년의 괴리라는 것이 컸던 것 같다. 포가 팬더들의 마을에 있는 동안 포의 앞에는 키워준 아버지인 국수집 오리 아저씨와 자신의 생부인 팬더 아버지가 있었다. 두 아비저의 존재는 포의 정체성 안의 혼란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포는 팬더들의 행동 양식을 배우려고 한다. 하지만, 그 행동 양식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포가 팬더들과 놀고 있을 때, 이번 3편의 적인 카이는 시푸와 그의 제자들을 이기고 마을을 부셔 버린다. 그리고 포를 찾아 팬더 마을로 찾아오고 있었다. 사람들은 세상을 살면서 많은 모습을 강요받는다. 사회적으로 우리가 가면을 쓰는 이유는 사회에서 제시하는 가면을 쓰지 않을 경우, 우리에게 사회적 불이익이 오기도 하고, 사회에서 제시한 그 이상적 모습이 나의 현실의 모습과 괴리가 있을 때, 우리는 정체성의 혼란이 오기도 하며, 방황을 하게 된다. 포의 경우도 겉 모습은 판다이지만, 그는 판다의 습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즉, 판다 마을에서 보여지는 판다의 모습과 포의 모습은 너무나 괴리가 컸던 것이다.


내가 내자신이 될 수 있을 때,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이번 편의 적인 카이는 강했다. 그를 이기기 위해서는 진정한 용의 전사가 되어야만 했다. 어떻게 보면, 카이는 포의 안티테제이다. 카이라는 캐릭터는 자신의 동지 였던 거북이 우그웨이와 수없이 많은 쿵푸 고수들을 자신의 힘으로 흡수했다. 그는 전투를 할 때, 흡수한 쿵푸 고수들을 좀비로 만들어 싸움을 한다. 여기서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좀비들을 움직일 때, 그가 좀비들 한 명 한 명의 시선으로 전투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이런 전투 방식은 그들의 힘 하나 하나가 그 안에서 융화되는 것이 하니라 각각의 개별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그는 그때 그때 자신의 역할을 나누는 모습을 보인다. 그에 비해 포가 용의 전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한 자기 자신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즉, 그는 자신이 팬더도 아니고 오리도 아니라 포 그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는 평화를 가져온다. 바로 그 정체성의 어중간 함이 바로 나 자신이었던 것이다. 가끔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을 완벽한 사람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힘이 든다. 하지만, 나는 물건도 잊어 먹고 빈틈도 많으며, 바보 같은 소리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나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쉬운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사회는 합리적이며 일 잘하고 효율적인 사람이 사회가 바라는 인간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모습이 이렇게 빈틈이 많은데 그것을 사회에 끼워 맞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사회 속에서 나를 나 자신으로 받아들인 다는 것은 과거에 비해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우리가 방황을 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의 모습만을 고집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세상을 살면서 별 것도 아닌 것에 고민을 많이 했던 것같다. 그 이유는 바로 내 안에 수없이 많은 나를 부정하고 나라는 존재는 하나의 모습으로 수렴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가령, 내가 스티브 잡스가 내 롤 모델이라고 했을 때, 나는 그와 같이 삶을 산다고 가정을 한자. 나도 학교를 때려치고, 그와 같이 청바지를 입고 검은 셔츠를 입으며, 안경을 쓰고 신경질을 낸다고 해서 나는 스티브잡스가 될 수 없다. 오히려, 그를 모방하고 모방할 수록 내 자신의 이상적인 그와 내 모습 사이의 괴리감으로 절망을 할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내 자신을 받아들인 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내 안에 수없이 많은 나의 모습을 사랑하는 것 부터가 시작이다. 그 모습들 중에 찌질하고 보기 싫은 모습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습을 받아들이고 그 찌질한 모습까지도 나라는 것을 받아 들일 때, 나는 내 자신이 되는 것이며, 이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내 자신을 사랑하는 행동에서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솔직히 이런 이야기가 현실에서 뜬 구름 잡는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먼저 생각해보자. 우리는 머리 털 나고 부터 사회적으로 어떤 사람이 되어야 된다고 강요를 받으며, 끝없는 경쟁 속에서 우리는 내 자신에 대해 생각해보고 고민하는 시간을 잃었다. 지금의 사회는 우리가 자신을 성찰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이런 사회의 부조리함 속에서 우리가 살아서 생명력있게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생존법은 바로 내 자신을 사랑하고 그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나는 어제와 다른 오늘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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